'근대'라는 단어.

아마 이 단어를 둘러싼 다툼처럼 격렬한 것도 드물 것 같다. 헤겔이 과거와 구분되는 현재를 일컫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이후, 근대를 둘러싼 전투는 현재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가 좋은 것인지, 혹은 나쁜 것인지에 대한 가치평가에서부터, 무엇을 근대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의의 차원, 심지어는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근대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기간 설정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광범위한 합의에 도달한 것은 없다시피 하다. 다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이런 식의 시대 구분 자체를 포기하는 쪽으로 합의가 이루어져가는 것 같기는 하다.

사회현실이란 덧없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 안에 존재하며, 과거로 옮아감에 따라 소멸한다. 과거는 사실 지금 있는 모습대로 이야기될 수 있을 뿐이지 과거의 모습대로 이야기될 수는 없다. 과거를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현재의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지고 현재의 사회체제에 영향을 주는 하나의 사회행위인 것이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나종일 외 옮김, "근대세계체제 I – 자본주의적 농업과 16세기 유럽 세계경제의 기원", ‘서론: 사회변화에 대한 연구’, 까치, p.26

하지만 개념이 사라진다고 해서 논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현실에서는 거의 사용하는 경우가 없는 단어이지만, '근대'는 결국 지금 현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 사람들이 어떠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현재의 세계가 어떻게 현재의 모양이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기 마련이다. 추상적인 개념적 틀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하면 결국 이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개념은 현재의 일상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어 '왜' 그렇게 되었느냐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체제(자본주의)가 유지되려면 몇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우선, 기축적 노동 분업이 존재해야 한다. 즉 이윤은 낮은데 경쟁은 매우 치열한 (즉 주변부의) 필수품들과 이윤이 높고 준독점화된 (즉 중심부의) 상품들 간의 지속적인 교환 같은 것이다. 기업가들로 하여금 그 체제 내에서 성공적으로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효력(힘)의 정도가 서로 다른 의사주권 국가들로 구성된 국가간체제가 추가적으로 존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새로운 준독점적 이윤 창출 기업들의 항구적인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주기적 메커니즘들이 또한 필요하다. 그 결과로 그 체제의 특권적 중심들의 매우 느리지만 끊임없는 지리적 재배치가 생겨난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김인중 외 옮김, "근대세계체제 III –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거대한 팽창의 두 번째 시대 1730-1840년대", 까치, iii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아주 충실하게 현재의 세계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에게 현재의 세계란 계층적인 질서가 확고하게 자리잡은 세계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페르낭 브로델의 논지를 이어받는데, 즉 GDP 등의 경제지수로 나타나는 국가간의 일련의 순위는 물론, 각 국가 안에서 각 개인들의 지위가 정해지는 방식이 16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에 그 기원을 둔다고 생각한다. 이 새로운 방식이 바로 자본주의이며, 자본주의란 이윤 축적이 곧 목표이자 존재이유인 체제라 할 수 있다.

시장거래에서 어느 한쪽이 자기 상품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 힘을 사용하는 일이 자본주의가 발명해낸 짓은 아니었다. 부등가교환은 오랜 관행이었다. 역사적 체제로서 자본주의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같은 부등가교환을 은폐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나종일, 백영경 옮김,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역사적 자본주의 - 1. 만물의 상품화: 자본의 생산’, 창작과 비평사, p.33

하지만 '새로운'이라는 단어에도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1790년대를 분기점으로 하는 이중의 혁명, 산업혁명과 정치혁명(프랑스혁명)을 통해 근대를 설명하는 에릭 홉스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세계는 불평등한 위계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불평등이 전지구적 단위로 조직되고 그 정도가 더욱 심화된다는 점에서 '근대'라는 개념은 여전히 유효성을 지닌다. 자본주의는 전근대사회의 혈통과 인맥에 근거한 질서를 대체하는 정당화 논리와 실제적인 강제력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는데, 그것이 바로 능력주의와 국가 체제이다.

(…) 제도화된 능력주의 체제는 소수의 사람들이 마땅히 앉을 자격이 있는, 그리고 만약 다른 체제하에서라면 그들이 배제될 수도 있는 그런 지위를 따내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 체제는 업적에 따른 지위 획득이라는 그럴듯한 구실 아래, 더욱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속해 있는 신분status에 따라 지위를 얻도록 해주는 것이다.
– ‘자본주의 문명 - 1. 득실표’, p.142

아직 완간되지 않은 "근대세계체계"에 대한 총평은 아쉽게도 불가능하겠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을 반동으로 해석하는 시각, 분업구조의 확대 과정을 추적해가는 폭넓은 시야, 그리고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를 연상케 하는 국가권력을 둘러싼 엘리층의 경쟁에 대한 서술 등 곰곰히 곱씹어볼만한 지점이 많다고는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내가 살아가는 현재는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끊임없는 한 과정으로써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세계가 실제로 어떠한 모양을 가지느냐와 무관할 수 없다는 확신이야말로 그의 저서에서 가장 의미깊은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현실적인 것으로 규정하면 그 결과 그것은 현실적인 것이 된다.”
– "근대세계체제 III", p.200-201 / Thomas & Thomas(1928, 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