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든 예술작품이든, 어떠한 컨텐츠를 접하는 이유는 우선적으로 그 내용에 있을 것 같다. 보다 검증된 사실이나 최신의 트렌트를 원한다면 고전처럼 나쁜 선택도 또 달리 없겠다. 하지만 굳이 곰팡내나는 구닥다리들을 다시 들추게 되는 이유, 때로는 허술하고, 때로는 촌스러우며, 때로는 잘못된 사실들이 넘쳐날 때도 있고, 또 때로는 편협하기까지 한 옛것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고전에서는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사고의 지난한 흔적들을 찾아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 재산이 평등해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재능이 같을 수 없음에도, 필경 같은 국가에서 시민인 자들의 권리가 그들 사이에서는 동등해야만 합니다. 실제로 나라란 시민들의 권리의 결사체가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김창성 옮김, "국가론", '제1권', 한길사, p.137

키케로는 독보적이라고 평가되는 인물은 아니다. 심하게는 그리스의 사상가들에게서 한치도 더 나아가는 점이 없다, 귀족적인 로마 세계에 안주하려 했던 인물이라며 폄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상사나 정치학 쪽에 관심이 있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가 얼마나 많은 저술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현실주의자였고, 또한 현존하는 불의보다도 변화가 가져올 혼란에 더욱 조심스러워 했던 보수주의자이자, 이익이나 자유보다는 사회적 합의를 앞세웠던 공화주의자이기도 했다.

무릇 법률이란 자연본성의 위력이고, 현명한 인간의 지성이자 이성이며, 정의와 불의의 척도네. 그렇지만 우리는 모든 언어를 인민의 지성 수준에 맞추어 구사해야 할 것이고, 대중이 일컫는 대로 명하거나 금지함으로써 일단 문자로 기록해 승인한 것을 법률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네.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성염 옮김, "법률론", '제1권', 한길사, p.71

이러한 키케로의 복합적인 면모는 로마 제국이라는 멀게만 느껴지는 시대에 대해 얼마나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제우스 신상 앞에서 축제를 벌였던 로마인에게도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예를 부리며 안락한 삶을 누리는 로마 시민에게도 마음 속 깊은 곳엔 정복 활동과 노예제에 대한 가책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유려하고 화려한 색채를 사랑하는 심성 가운데에서 냉소적인 자기성찰의 인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한 해적이] 어떤 악의로 동기가 유발되어 한 척의 해적선으로 바다를 위험하게 했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알렉산드로스여) 그대가 세계를 차지한 것과 동일한 악으로'라고 대답했다.
- "국가론", '제3권', p.227 / 노니우스

키케로의 인용자들이 그의 어떠한 면모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왔는지는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하나의 공통점 정도는 있는 듯 싶다. 즉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예찬하는 찬미자로써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주는 경계자로써 그를 대해왔다는 점 말이다. '정의의 어머니는 연약함(p.226)'이라는 말, 상대적인 약자들에 대한 잔인함을 곧 현실이라 일컫는 현재, 키케로의 고리타분함이 오히려 신선하게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