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구멍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으며, 망각이 가능하기에는 이 세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단 한 사람이라도 항상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제14장 증거와 증언', 한길사, p. 324


그녀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규칙에 맞춰 살아간다는 게 어떻게 악이 될 수 있는지를,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신랄하게 드러내려 한다.

아마도 허탈한 웃음을 짓지 않고서 이 책을 읽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만 같다. 제2차세계대전이 남긴 비극의 상징, 유대인학살이 마치 인류의 조크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학살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기록하며, 나치란 존재가 어떤 특별하고도 사악한 악마들이 아니라 그들도 그저 너무나도 평범한 인간들에 불과했다고 역설한다.

제2차세계대전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다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충격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다. 가해자 나치와 피해자 유대인 간의 놀라운 유사성과 거의 대개 이루어졌던 상호합의, 그리고 이러한 상호합의가 없었던 곳에서는 사실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나치의 무력함 등이 역사적 실례로 증명되는 광경은 '정말? 진짜?"라며 연이어 되묻게 한다. 게다가 나치가 그 모든 가해과정을 철저하게 '법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가히 압권에 가깝다.

이 책을 덮자마자(사실은 읽는 내내), 서양의 근대화에 관한 두 권의 특별한 책들, 한나 아렌트의 또 다른 저서 "인간의 조건"과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한나 아렌트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이로 말미암은 기계화 속에서 근대화를 발견하고, 엘리아스는 보다 더 교양있는 사람이 되려는 인간의 욕구 속에서 근대화를 발견한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내리는 결론은 똑같다. 근대화란 결국 "인간이 자기통제 속에 속박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섬뜩하다. 이 말은 곧 인간의 개별성이 곧 '일반화'되었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 모두 이러한 일반화가 결국 현대의 병폐라고 진단한다. 엘리아스의 경우에는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과도하게 억제해야 하는 심리적인 부분에서, 한나 아렌트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똑같아진(그녀의 언어로는, 동질적인) 인간들은 특수성이라든지 개별성을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는 윤리적 차원으로 접근하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말로 할 수 없는 진리가 존재할 수도 있다. 이 진리는 단독적으로 살아가는 인간, 즉 비정치적인 인간에게 더욱 적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행위하며 살아가는 복수의 인간들은 자신과 타인에게 의미있는 말을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유의미성을 경험할수 있다. -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태정호 옮김, "인간의 조건", '서론', 한실사, p.52-53

한나 아렌트에게서 말과 행동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쩌면 말은 인간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무수한 비극의 원인은 곧, 말이 상투어, 즉 유행이 되어버렸다는 것, 오직 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