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돌이켜 1999년으로 잠시 돌아가보자. 당시 사람들은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20세기의 험난한 경험 탓에 호들갑스런 낙관에 빠져들 수는 없었더라도 여전히 21세기는 기대할만한 것이었다. 물론 하룻밤 사이에 세상살이가 갑자기 나아질리도 없었고, 또 한편으론 종말론과 같은 염세주의가 만연했던 것도 사실이다. 만화 "20세기 소년(1999-2007)"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처럼, 그냥 그런 사람들이 여차저차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일상적인 소망이 설득력을 얻어가던 때라고도 할 수 있겠다.

생명은 생존에 관한 것이고, 삶에서 성공하는 것은 타인들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이다. 생존하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2000년 판 후기: 기억해야 할 의무', 새물결, p.383

그리고 세계는 멸망했다, 라고 아직은 말하지 않을 수 있어 다행스럽다. 새로운 세기의 시작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하던 지그문트 바우만의 이야기는 단지 야만적'이었던' 지난 세기의 증언처럼 들릴 따름이었다. 그러나 일상의 긍정을 말하던 담론이 얼마나 빠르게 '생존'이라는 단어로 그 중심점을 옮겨왔는지를 되짚어보면,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에 대한 그의 고민이 얼마나 시급한 현실을 담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한 사람의 성공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 '5. 피해자들의 협력 끌어내기', p.248

슬라보예 지젝이 속박이라 부를 정도로, 나치의 만행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끊임없이 진지한 지성을 괴롭혀온 질문이었다. 나치에 의해, 아니 사실상 20세기 내내 곳곳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게토와 가스실은 역사적 우연으로 변명될 수 없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특정한 개인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려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이데올로기를 문제삼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은 너무나 편리해서 공허할 따름이었다.

홀로코스트가 실행된 길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도 홀로코스트는 합리성의 원칙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최종해결책'은 어느 단계에서도 효율적인 최적의 목표 수행에 대한 합리적 추구와 충돌하지 않았다.
- '1. 서론: 홀로코스트 이후의 사회학', p.51-52

왜 이토록 참담한 일들이 벌어지는가.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선 각종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계획들이 실현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을 이유로 꼽는다. 유대인 혐오와 같은 맹목적인 증오가 역사에서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이러한 증오를 조직화하고 철저한 계획 하에 실행한다는 것은 그것이 가능해졌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가능하다'는 현대문명이 지녀온 자신감이자 낙관의 기초였다. 하지만 이는 양심을 마비시키는 마법의 주문이기도 했다.

사회적 거리의 사회적 생산, 이것은 도덕적 책임(성)에 대한 압력을 무화하거나 약화시킨다. 그리고 도덕적 책임(성)을 기술적 책임(성)으로 대체하는 것. 이것은 행위의 도덕적 의미를 효과적으로 은폐한다.
- '7. 도덕(성)에 관한 사회학 이론을 향해', p.328-329

현대사회의 조직된 분업체계는 도덕적 양심을 잠재우는 댓가로 '대체양심'을 제공한다. 명령을 받아 일상적으로 대상을 처리한다는 사실 자체가 내적인 갈등을 방지해준다. 이는 문명화를 보기 싫은 것들을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과정으로 설명하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나, 기계화로 인한 단조로운 노동이 단조로운 지성을 생산해내고 있다는 한나 아렌트의 분석과 맞닿는 지점이다. 맡은 일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하는지가 새로운 양심의 기준이 된다. 스스로의 행위가 옳은지를 따져물을 필요도 없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나중이야 어떻게 되든 우선 당장은, 질문하지 않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신기한 우연의 일치로 다음 날이 없을 때까지' 그저 하루하루 살아진다.
-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쓰레기가 되는 삶들", '4. 쓰레기 문화', p.181

다만 합리성 자체를 악의 근원으로 지목하는 결론에는 그다지 동의하기 어렵다. 현대문명은 나날이 도태되는 사람들의 숫자를 늘려나가고 있다. '덜 영리하고, 덜 기민하고, 약삭빠르지 못하고, 힘이 없거나, 덜 모험적인(p.37)' 사람들을 선별해내는 데에 점점 더 거리낌이 없다. 개인들에게 자기가 살아남아도 되는 이유를 끊임없이 증명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화 과정은 도덕적 능력을 조작하는 것("현대성과 홀로코스트", p.299)'이라는 생각에서 드러나는 바대로, 사회가 개인들을 기능으로 취급하려 해왔다는 게 더욱 문제의 본질에 가깝지 않을까. 역할로써의 인간처럼 불안한 것도, 억압받는 것도 없다. 역할이 사라지는 순간, 존재 역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