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이후 민주주의는 당연한 것이었다. 시장주의의 승리와 맞물려 민주주의는 사회정의의 유일한 실현수단으로 인정받았고, 인류에게 남겨진 과제란 오직 이 승리를 더욱 확대시켜나가는 것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거의 30여년이 흐른 지금, 인류는 더 많은 갈등과 더 많은 불평등, 더 많은 숙제들이 쌓여가는 현실과 맞닥뜨리고 있다. 시장주의에 반발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있으며, 민주주의 역시 더이상 당연한 것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가문과 재산에 따르는 모든 특권이 폐지되고 누구나 어떤 직업이라도 가질 수 있고 자기 자신의 능력에 따라 정상에 오를 수 있을 때는, 누구나 자기 자신이 비천한 운명을 타고난 것은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으로 일상적인 경험에 의해 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을 방해하는 몇몇 사람의 특권을 없애버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사람이 경쟁해야 하는 상황을 가져왔다. 장벽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이 바뀌었을 뿐이다.
- 알렉시 드 토크빌, 임효선·박지동 옮김, "미국의 민주주의 II", '제2부 민주주의가 아메리카인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 한길사, p.705

민주주의란 무엇이며 왜 민주주의를 해야 하는가. 10년 전만 하더라도 현학적인 취미로 면박받았을 이 질문을 떠올리면서, 어떠한 질문에도 유통기한 따위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이 인용한 말처럼 '확정된 견해는 깊은 잠에 빠'지기 때문이다("자유론", '사상과 언론의 자유'). 왜 민주주의인가. 아마 알렉시 드 토크빌이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어떠한 관습을 만들어가느냐의 문제이다. 이를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살아가는 곳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만사가 법으로 해결될 수 있거나 정치제도가 상식과 공중도덕을 대신할 수 있는 나라는 있을 수 없다.
- "미국의 민주주의 I", '제8장 연방헌법', p.187

농경문명에서 사람의 삶이란 대체로 자신이 태어난 터전에 귀속되는 것이었다.  개인들은 좋든 싫든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해야 하는 관계로 묶여있었다. 영주든 성직자든 농민이든 이러한 관계에 기반한 관심과 온정주의의 보살핌에 적어도 심리적으로는 의지할 수 있었다. 땅과 인간은 분리가 불가능했다. 또 그만큼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 대해 무관심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상공업의 지속적인 발전은 인간을 토지의 속박에서 탈출할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사실상 추방시켰다. 촌락 공동체들은 곳곳에서 허공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 속도는 비약적으로 가속되고 있었다.

극단적인 분업만큼 인간을 물질화하고 또한 노동으로부터 얻는 최소한의 기쁨을 빼앗는 것도 없다.
- '제18장 합중국에 거주하는 세 종족의 현황과 전망', p.519

출생에 따른 윤리를 강요하던 앙시앙 레짐은 사상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점점 설득력을 잃어갔다. 문제는 옛 권위가 사라진 자리를 채우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혁명으로 왕과 귀족들의 목을 베었더니 황제가 나타났다. 다시 그가 쫓겨난 자리를 차지한 구관은 여전히 구관일 따름이었다. 혼란 속에서 금권의 힘은 유례없이 강해져갔고, 그만큼 하층민들은 '사탄의 맷돌'에 갈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귀족층의 운명과 부르주아지의 운명이 아무리 서로 달랐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점에서는 서로 닮았다. 그것은 귀족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역시 인민과 격리된 채로 살았다는 점이다. 부르주아는 농민들과 가까워지지는커녕 가난한 그들과 접촉하는 것을 회피했으며, 또한 공통의 불평등에 맞서 함께 투쟁하기 위해 굳건히 단결하기는커녕 자신에게 유용하게 쓰일 새로운 불의를 창조해 내려 애썼을 따름이다.
- 알렉시 드 토크빌 지음, 이용재 옮김,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 혁명", 지식을 만드는 지식, p.239

19세기 초중반의 극심한 무질서 속에서 토크빌은 민주주의에 주목한다. 그는 프랑스 혁명 이전부터 중앙권력이 지속적으로 증대되어왔음을 밝히고, 그러한 권력이 점점 더 제어가 불가능한 전제에 빠져들어가고 있다고 보았다. 삶의 터전을 상실한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관심 역시 상실할 수 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방임된 권력은 더욱 폭압적인 신분질서를 구축해나가리라는 것이다.

'국가의 의지'라는 말은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가장 사악하고 독재적인 자들이 가장 악랄하게 악용한 말들 가운데 하나이다.
- "미국의 민주주의 I", '제4장 아메리카의 주권재민 원칙', p.115

'Divide and Rule'이라는 경구처럼 권력은 사람들이 산산히 흩어지기를 바란다. 시민들이 사회에 대해 무관심해지길 바라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각자 자기 일과 자기 이익을 챙기는 데에 바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들끼리 서로를 증오할 때 권력의 힘은 어느 때보다도 막강해진다. 물론 갈등이 없는 사회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갈등과 어떻게 대면하느냐는 오로지 시민들의 뜻에 달려 있다.

사실상 민주사회는 게으른 사람이 별로 없다. 인생은 소음과 흥분 속에서 지나간다. 그리고 인간은 너무나 행동하는 데 몰두하고 있으므로 사고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그들은 고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맡은 일에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해두고자 한다. 그들은 언제나 행동하고 있으며, 그들의 각개 행동은 그들의 모든 재능을 흡수해버린다.
- "미국의 민주주의 II", '제3부 풍습에 대한 민주주의의 영향', p.829

따라서 토크빌에게 민주주의란 곧 시민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의무를 부여하는 동시에 그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것이었다. (견제되지 않는 권력의 위험은 지방자치에서도 예외는 될 수 없고, 오히려 지나친 특수성은 지역 내외의 불평등과 갈등을 더욱 증폭시킬 수 있으며, 게다가 현대사회에서 지역의 의미가 점점 더 퇴색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중앙권력의 확대 자체를 죄악시하는 토크빌의 지방주의적 감수성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더 큰 힘은 더 크게 오용될 수 있다는 견해만큼은 이미 역사가 숱하게 증명해왔다고 믿는다. 민주주의는 빠르고 손쉽고 편하고 효율적인 길과는 거리가 멀다. 토크빌이 민주주의에 주목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끊임없는 질문과 거듭되는 숙고. 질문이 멈추는 순간 민주주의는 허울에 불과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