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의 대상에서 관리의 대상으로, 비난과 응징에서 분류와 계도로, 감내하는 존재에서 평가받는 존재로. "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성의 역사"로 이어지는 미셸 푸코의 저작들에서 역사는 비정상이 된다. 근대를 거치며 사회는 '비정상'을 어떻게 규정하고 다루어왔는가, 미셸 푸코는 이성의 빛에 의해 포위된 장소, 그 소외의 공간을 추적해나간다.

범죄자의 정신을 재판의 대상으로 삼는데 과장된 언어가 사용되고, 이해성이 많은 관심이 기울여지고, 엄청난 '학문적' 열성이 보여지고 있는 것은 범죄와 동시에 그 정신을 재판하기 위해서이고, 처벌하는 데 있어 그 정신을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 즉, 여러 가지 범죄를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객체의 장 속에 정식으로 대상화함으로써, 그들 학문은 이제는 범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개인에 대해서 그리고 개인이 행한 사항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현재, 미래 또는 가능성으로 볼 때 어떤 인간이며, 어떤 인간일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여 그것을 형벌기관에 제공하는 것이다.
-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감시와 처벌", '제1부 신체형, 제1장 수형자의 신체', 나남, p.46-47

한나 아렌트노르베르트 엘리아스처럼 푸코에게도 근대는 자기통제화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한나 아렌트가 과학의 산물인 기계화에서 무비판적으로 규칙(혹은 명령)을 준수하는 인간을 발견하고, 엘리아스가 상류층이 되고자 하는 하류층의 욕망과, 하류층과 스스로를 구분짓고자 하는 상류층의 욕망 사이의 끊임없는 술래잡기에 주목했다면, 푸코의 경우에는 지식과 담론의 차원, 즉 통제와 예측을 목적으로 한 사회적 규범에서 자기통제를 발견한다.

18세기에 권력의 기술에서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혁신의 하나는 "인구"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등장한다는 점인데, 여기에서 인구라고 하는 것은 부로서의 인구, 노동력이나 노동 역량으로서의 인구, 증가 자체와 증가에 의해 마련되는 자원 사이의 균형으로 파악된 인구이다. (...) 그러나 한 사회의 미래와 운명이 시민의 수와 미덕, 결혼의 관습과 가족의 구성뿐만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성을 이용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고 적어도 한결같이 단언되기는 그때가 처음이다.
-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 '제2장 억압의 가설', 나남, p.30-31

데카르트 이래로 규범은 점차 이성의 명령으로써의 모습을 갖추어왔다. 근대의 위대한 주자들은 인간을 이성의 동물로 정의하고, 이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푸코는 어떠한 사상도 언어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데에서 출발점을 찍는다. 언어는 사회적 규약이다. 따라서 모든 사상은 사회적 규약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또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성의 동물이라고 정의할 때, 과연 그 '이성'이 무엇인지를 누가 정의할 수 있는가에 대해 푸코는 심각한 의문을 갖는다.

시험이란 것은 어떤 지식 습득을 평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평가의 기본적인 요소로서 끊임없이 재가동되는 권력의 의식에 따라 권력의 기반이 된다.
- "감시와 처벌", '제3부 규율, 제2장 효과적인 훈육방법', p.292

범죄가 개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이방인처럼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 (...) 이러한 상황에서 법이 만인의 이름으로 만인을 위해 만들어진다고 믿는 것은 위선이거나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법은 일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효과를 인정하는 것이 더 현명한 생각이다;
- '제4부 감옥, 제2장 위법행위와 비행', p.420

역사적으로 추방되었던 영역들, 특히나 근대의 '합리성(이성이 아니다)'이 비정상을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면밀하게 살피면서 푸코는 '저것은 무엇이다'라고 규정하는 데에서부터 이미 권력이 작용한다는 점을 밝히려 한다. 한 때 광기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폭로하는 역할이 맡겨지기도 했었다. 한 때 성은 건강한 삶을 위해 스스로를 관리하는 미덕의 하나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또 한 때 가난은 소리 없이 고통을 감내하는 신성함이 깃들었었다.

하지만 이성의 시대 동안 이 모든 것은 탈선으로, 관리되고 통제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면모해버린다. 합리적이지 못한 이성은 이성에 의해 격리되었고, 처벌을 통해 스스로를 과시하던 권력은 감금에 의한 배제로, 미시적인 규율로 점차 그 자리를 옮겨갔으며, 개별화된 인간에게 자유란 결국 자기통제의 다른 이름에 불과해진다. 이제 관리는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좋은 삶을 향유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비정상적인 개체로서 사회로부터 소외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가 된다.

그토록 많은 자유는 더 이상 시간의 통제를 허용하지 않는다. 즉, 시간은 불확실성에 내맡겨지고, 각자는 국가에 의해 변동의 물결 속으로 떠넘겨진다. "영국은 상업국이고, 정신은 늘 투기에 몰두하는 탓으로 두려움과 소망에 끊임없이 휘둘린다. 이기주의, 상인정신은 쉽사리 질투에 빠지고 다른 재능을 불러들여 이용한다." 게다가 이러한 자유는 진정한 자유와 관계가 멀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가장 정당한 욕망과 대립하는 요구에 의해 사방에서 속박과 압박을 받는다. 즉, 인간의 자유, 정신과 감성의 자유가 아니라 욕심, 결탈, 금융 술책의 자유이다. 돈 때문에 가정은 어느 다른 곳보다도 더 압제적이게 된다.
-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광기의 역사", '제3부, 제1장 대공포', 나남, p.577

미셸 푸코의 이야기는 우울한 증언이다. 개인의 일상이 무차별적으로 데이터화되고, 얼마든지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현재에 있어서는 더욱 그런 것 같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간을 집단화된 명칭으로 구분하는 경향도 강해져 간다. 근대 이전의 권력이 이름의 문제였다면, 현재에는 더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