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케빈에 대하여"가 떠오른다. 이유도 알 수 없고, 또 어떻게 해야할 지도 알 수가 없다. 별 것 아닌 농담처럼 내뱉어지는 잔인함. '충격'이라는 단어가 추임새 마냥 들러붙는 현재라 해도, "시계태엽 오렌지"는 그 이해하기 어려운 제목만큼이나 차갑게 다가온다.

"이제 어떻게 될까, 응?"
- 앤서니 버지스 지음, 박시영 옮김, "시계태엽 오렌지", '제1부', 민음사, p.7

앤서니 버지스는 이 짧은 작품 안에서 똑같은 질문을 세 차례 변주한다. 너라는 존재, 나라는 존재, 그리고 나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는 저 짧은 질문이 나올 때마다 의미를 상실해간다.

열 다섯 살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알렉스에게 사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친구도, 가족도, 여타의 인물들도 오로지 비웃음으로만 존재할 뿐, 진실은 커녕 일말의 진지함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변의 세계에게도 알렉스는 정확히 그런 존재이다. 시끄럽고 말썽 많고 탐탁치 않은 인간. 말끔하게 정리된 서류에서 베토벤을 좋아하는 사소한 취향 따위를 확인할 수는 없다. 경찰에게나, 성직자에게나, 의사에게나, 정치인에게나, 언론인에게나, 그는 교화의 대상이거나, 이용의 대상이거나, 치료의 대상이거나, 선전의 대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시계태엽 오렌지"에서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 상급자와 부하, 가해자와 피해자, 경찰 등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네가 존재하기'를 강요하고 또 강요받는 역할들만이 있을 뿐이다.

"오, 착하게 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겠죠." 여러분, 난 속으로는 진짜 큰 소리로 웃었지. 놈이 말했어.
"착하게 되는 것이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6655321번. 착하게 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일 수도 있어. 말하고 보니 자기 모순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번 일 때문에 며칠 동안 잠 못 들어 할 거야. 신은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
- '제2부', p.114

문제를 제거하는 손쉬운 방법. 그건 상대의 고통을 무시하는 걸로도 충분하다. 인간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이 없다면 사회 역시 대상들의 단순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알렉스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