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전쟁이 끝났다. 세계대전이라는 명칭 그대로,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지구의 어디에도 없었다. 직접적인 전장이 되어 일상적인 생필품을 구하는 데에 생명을 걸어야 했던 지역만 해도, 영국에서부터 유럽대륙과 북아프리카를 지나 인도차이나와 동아시아 전역에 이르렀다. 승리한 연합국이건 패배한 추축국이건, 혹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휘말려 줄서기를 해야 했던 그밖의 수많은 나라들이건, 한 가지의 감정만큼은 공유할 수 있었다. 이제는 모두 끝났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과거의 모든 삶을 악몽이나 공포영화라고 치부한 채 과거를 잊고 미래만 생각할 수 있을까?
- 이안 부루마 지음, 신보영 옮김, "0년", '제4장 귀향', 글항아리, p.185

하지만 그 속에는 온전한 기쁨의, 희망의, 심지어는 안도의 기색마저 담겨있지 않았다. 평화는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뜻밖의 질문과 함께 찾아왔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것이라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절박한 상황은 절박한 생각과 절박한 행동을 낳고, 그리고 그로부터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환호성이 울려퍼지는 거리에서 누군가는 복수를 다짐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식량을 얻기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1945년, 비록 숨가쁘게 전후질서가 만들어져가고 있었지만 새로운 미래에 대한 전망은 섣부른 것이었다. 파괴되어 버린 일상에서 사람들이 잃어버린 건 단지 일상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45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전 세계에서 신문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받았을 느낌은, 대부분이 삶을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어서 국제 뉴스에는 더 이상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 '제9장 하나의 세계를 위하여', p.422

솔직히 말해, "0년"은 쉽게 읽을 수 없다. 내용이 난해하다거나 무언가 심오한 철학을 설파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안 부루마는 단지 1945년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의미였을까를 담담하게 따라갈 뿐이다. 아름다울 것도 추할 것도 선도 악도 없다. 영웅이나 절대적인 악한도, 찬양받거나 비난받아 마땅한 것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있었고, 싸웠고, 살아남으려 애썼다는 사실만이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살아남고자 하는 바람을 가졌다는 그 자체가 악이었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법의 외곽지대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범죄가 인간적 평등을 다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기 때문이다("전체주의의 기원 1", p.517)'.

아버지 이야기에는 내가 오랫동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경험담은 아버지 나이나 가정 환경을 감안할 때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었다. 물론 더 불행한 이야기도 많겠지만 아버지가 겪은 일도 충분히 그랬다.
- '프롤로그', p.26

과연 이안 부루마의 생각처럼 현대세계의 원년이라 칭할 정도인지는 의문이지만, 1945년이 인류사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라는 점은 분명하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무기들을 만들어냈으며, 또한 그게 가능했기 때문에 했을 뿐이었다. 얼마 전 작고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바로 이 점이말로 현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그렇다면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전쟁이 정말 1945년에 끝났을까?(p.426)' 이안 부루마는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0년"의 시대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노력의 끝에서 70여년이 지난 현재, 인류가 1945년의 세계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를 궁금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