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를 읽어볼 이는 거의 없겠지만, 그를 읽고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왜 그토록 많은 정치학자나 사상가들이 여전히 칸트의 이름을 입에 자주 올리는지를 이해할 수 있으며, 특히 하버마스가 근대를 미완의 기획이라 평했을 때 그 속에 어떠한 희망이 담겨 있었는지를 느끼게 된다. 인류사에서 아마도 가장 야심차고 신중하면서도 필사적인 기획. 순전한 지적 허영으로 접근했던 칸트에게서 받을 수 있었던 의외의 인상이었다.

이 세계에서 가능한 최고의,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궁극목적으로 촉진해야 할 물리적 선은 행복, 즉 인간이 행복할 만한 품격으로서의 윤리성의 법칙과 일치하는 객관적 조건 아래에서의 행복이다.
-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판단력비판", 아카넷, p.531

칸트의 작업은 행복을 윤리의 토대 위에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홉스로크, 루소 등의 경우 저마다 행복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 어느 정도까지 제약을 가해야 하는가에 대한 시각차가 있을 뿐, 자연상태가 곧 자유라는 데에서 자신들의 논의를 출발한다. 하지만 칸트에게 자유란 자연상태가 아니었다. 자유란 무제약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즉 그는 사회 속에서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윤리적 원칙을 세우고 실천한다는 뜻으로 자유를 정의한다.

이성은 전제적인 권위를 갖지 않으며, 그의 발언은 항상 자유로운, 누구나 자기의 의혹을, 심지어는 거부권까지도 망설임 없이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시민들의 동의 이외의 것이 아니다.
- "순수이성비판", p.883-884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바로 윤리의 토대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느냐로 향하게 된다. 자유는 자연상태가 아니므로, 자연의 법칙성으로부터 자유를 도출해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신과 같은 전능한 존재로부터 받은 명령으로 정당화될 수도 없다. 오히려 반대로 윤리적 원칙으로써 타당한 경우에만 신의 명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서구철학의 전통에 따라 칸트는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그 실마리를 발견하려고 하는데, 바로 이러한 논의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의 주요한 뼈대를 이루게 되며, 그 각각은 다음의 질문에 대한 응답과도 같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 p.933

이 두터운 책이 말하는 요지는 간명하게 정리될 수 있다. 인간은 실천하기 전에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먼저 알고 판단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순전한 논리 혹은 순전한 경험 그 어느 하나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천을 위한 실천은 기껏해야 답습 내지는 강박, 자기본위에 지나지 않는다. 논리는 굳이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보지 않더라도 똥인지 된장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새로운 인식을 창출해낼 수 없다. 또한 경험은 똥과 된장 이외의 다른 것에 대한 인식을 가져다주지만, 섣부른 일반화에 빠져들 수 있다. 자신만의 논리나 경험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이들과는 사실상 대화조차 어려운데, 개인적으로는 바로 이런 이들을 꼰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원칙들은 반드시 개념들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 밖의 모든 토대 위에서는 단지 변덕들이 성립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런 변덕들은 인격에게 아무런 도덕적 가치를 줄 수 없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조차도 줄 수가 없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 없이는 자기의 도덕적 마음씨에 대한 의식과 그러한 성격에 대한 의식, 즉 인간에서의 최고선은 결코 생길 수 없다.
– "실천이성비판", p.263

익히 알려진 바대로 칸트의 글이 매우 딱딱하고 엄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칸트의 논의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그러한 글쓰기 방식이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처럼 다가온다. 그는 자유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이자 안내자였고, 사실상 현재에도 그렇다. 스스로 사고하며 인식을 넓혀가는 한에서만 인간은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자유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거운 의미인지를 되짚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