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두려워진다. 바야흐로 어디에서나 '신자유주의'의 유령이 떠도는 시대가 아니던가. 비록 유명세는 한참 떨어지지만 어쨌든, 마르크스와는 또 다른 의미로 하이에크 역시 극렬하게 호불호가 갈리는 굇수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무려 신자유주의의 아버지,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의 선구자, 최후의 19세기적 인물, 칼 포퍼의 절친이자 케인스의 라이벌, 시카고 학파의 대표자 등등, 역시 큰 인물답게 어디서 들어본 듯 아닌 듯한 여러 타이틀을 보유하고도 계신다.

솔직히 의심스럽게 책장을 펼쳐 들었다. 시장만능, 세계화, FTA, 비정규직, 양극화, 민영화 등 각종 사회∙경제적 문제의 근본원인으로 지탄받는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답게, 사회는 곧 시장이고 시장에서는 이윤추구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설파할 경우를 대비해 라이터도 준비해놓았다. 제목부터 오카마의 길, 아니 "노예의 길"이라니,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노력하던 한 직장인 친구가 어느 날 스스로를 노예로 칭하던 농담까지 떠올라 이래저래 의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근데 씨바… 20세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의 대표적인 (그리고 유일하게 번역된) 저서는 경제학서가 아니었더랬다. 서문에서부터 하이에크는 정치에 대한 관심을 털어놓더니, 저서 내내 '경제적 동기란 게 따로 있을 수 있는 거임? 정치랑 경제는 한 몸인데 왜 자꾸 아니라고 함? 어차피 이거나 저거나 다 일상생활의 문제 아님?'이라면서 툭하면 '경제가 어려운데'만을 반복재생하시는 분들께 들려드려야 할 이야기들을 쏟아놓는다.

비록 민주적 절차를 통해 어떤 일을 하기로 결정하였더라도, 그 일의 달성을 위해 권력의 사용이 반드시 필요하며, 권력의 사용이 확고한 규칙들에 의해 제약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권력은 틀림없이 자의적이 될 수밖에 없다.
-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지음, 김이석 옮김, "노예의 길", '제5장 계획과 민주주의', 나남출판, p.122

물론 하이에크가 자유를 예찬한다는 건 사실이다. 그가 말하는 자유가 경제활동의 자유에 기반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다. 하이에크는 시장을 단순히 이윤창출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심지어 시장이 효율적이라고도 믿지 않았다. 그럼? 시장이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면서, 또한 동시에 마치 고대 그리스의 광장처럼 토론과 배움을 나누는 장소도 될 수 있다고 기대했던 것이다.

워낙 쌩뚱맞아서 쓰면서도 뭔가 아스트랄하다. 그렇지만 하이에크는 다른 시장주의자들과 자신을 분명하게 구분지었다. 경제행위는 '과학적 조직화' 아래 최대한의 효율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정당화될 수 없었다. 개개인의 선택이 요구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에서, 경제의 논리는 과학보다 먼저 윤리에 기반해야만 했다. 'back to the 고전파'를 외친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하이에크에게 경제 문제는 경제학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정치의 문제이자 삶의 태도와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돈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구두쇠와 같은 병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순수한 경제적 목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분별력이 있는 보통사람들의 활동의 궁극적 목적들은 결코 경제적이지 않다. 엄격하게 말해서 '경제적 동기economic motive'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경제적이지 않은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하는 데 있어 그 수단의 범위를 조건짓는 경제적 요인들이 있을 뿐이다. 통상 '경제적 동기'라고 쉽게 오해를 야기하게끔 오용되는 이 말은 단지 일반적 기회에 대한 욕구, 즉 구체화되지 않은 목적들을 성취할 수 있는 힘에 대한 욕구를 의미할 따름이다.
- '제7장 경제적 통제와 전체주의', p.144-145

하이에크가 1899년, 정말 19세기의 마지막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인물이라는 점은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는 폰 하이에크, 그러니까 귀족으로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내고는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일반시민이 되었다. 다들 아시듯, 제1차세계대전 이후의 오스트리아는 말 그대로 폭망이었다. 250여년간 이어져온 질서는 기차를 타고 초라하게 망명을 떠난 왕가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정치의 붕괴는 곧장 경제의 붕괴로 이어졌다. 곳곳이 폐허로 변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전장으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운 좋게' 살아 돌아온 상이군인들은 어느 샌가 '사회문제'가 되었고, 곧바로 찾아온 인플레이션의 압력에 패전국의 시민들은 물론, 비록 상대적으로는 사정이 나았지만 승전국의 시민들 역시 고통 받아야 했다. 전간기 동안 구 오스트리아 제국과 독일을 휩쓸었던 악명 높은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대해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바보스러운 혼란상태 때문에 한 주 한 주의 상황은 미친 듯이 변해 갔고, 비도덕적으로 되어 갔다. 40년간 착실하게 저축하고 또 그 돈을 애국적으로 전시 공채에 충당한 사람은 거지가 되었다. (…) 돈이 이와 같이 용해되고 증발되는 속에서는 어떠한 판단의 표준도, 어떠한 가치도 없었다. (…) 여기에다, 가치가 폭락하여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모든 판단의 표준을 잃어버리고 있는 사이에, 많은 외국인들은 오스트리아에서 이 혼잡을 틈타 부정한 이득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새로운 청년층 전체가 부모, 정치가, 교사를 믿지 않게 되었다. 국가가 내놓은 모든 지령, 모든 포고는 불신의 눈으로 읽혔다. 전후 세대는 이때까지 적용되고 있던 모든 것에 대해 일시에 난폭한 자기 해방을 주장했고, 모든 전통에 등을 돌렸다.
(…)
민중 전체에게 이러한 과열, 매일 신경을 쥐어짜는 이런 인플레의 줄타기는 참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전쟁에 지친 전 국민이 진정으로 바라고 있었던 것은 오직 질서와 평안, 얼마간의 안정과 시민적 생활이었다는 것은 어디서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남몰래 국민은 공화국(바이마르 공화국)을 싫어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화국이 요란스러운 자유를 억압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고삐를 너무 느슨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곽복록 옮김, "어제의 세계", 지식공작소, p.369-397

그리고 대공황이 밀어닥쳤다. 말 그대로 제1차세계대전(1914~1919)으로 국가가 무너지고, 하이퍼인플레이션(1919~24)으로 사회가 무너지고, 대공황(1929~33; 장기불황까지 감안하면 1928~38)으로 가정이 무너져 내렸다. 더 이상은 탈출가능한 '신대륙'도 없었다. 미래를 꿈꿀만한 여유는커녕 무언가 자신감을 가질만한 건덕지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극단의 시대에 민주주의는 무능한 구시대의 유산 중 하나로 여겨졌다. 이제 제2차세계대전(1939~45)으로 개인들이 무너져 내릴 차례가 되었다.

정도만 다를 뿐 세계는 전체주의에 물들어갔다. 국가의 요구에 군소리 없이 부응하라는 주장은 어디서나 통용되었다. 처칠은 전시체제의 '효율성'에 매력을 느꼈고, 인간을 '유용성'에 따라 분류했던 히틀러나 스탈린의 경우에는 편리하게도 열등한 민족이라든지 반동분자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1944년 출간된 "노예의 길"에서 하이에크가 중앙집중적 계획경제에 대해 제기하는 의문도 바로 이런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국가는 그 자체로 선을 실현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로크처럼 권력이나 부의 집중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보인다. 독점은 자유를 위협하는 가장 큰 해악이며, 따라서 생산수단이 누군가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만큼 중요한 과제가 또 없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국가의 독점도 독점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사적인 독점이 '노예의 길'을 강요한다면, 국가의 독점 역시 비슷한 운명을 강요할 게 분명했다.

만약 모든 생산수단들이 한 사람의 손에 귀속되어 있다면, 그 손이 '사회' 전체라는 이름의 손이든 아니면 독재자의 손이든 관계없이, 이러한 통제를 행사하는 자는 우리에 대해 완전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 "노예의 길", '제8장 누가, 누구를?', p.165

'아, 씨바 뭔 이야기를 하나 싶더니, 결국 최소국가론이잖아?'라는 항의가 귓가에 생생히 들려오는 듯 하다. 오, 노노, 오해다. 하이에크는 국가가 지상지옥이 될 위험성을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필요악 정도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국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었다. 여느 자유주의자들처럼 그 역시 경쟁의 원리를 바탕에 둔다. 근데 이유가 사뭇 색다르다. '더러우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으니까'란다. 뭐랄까, 사장님이 나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고, 매일 아침마다 씨바씨바하는 혼잣말 같기도 하다.

맞다. 더럽고 치사해도 그만둘 수 없으니까 인생이 꼬이는 거다. 짤릴까봐 전전긍긍해야 하고, 계속해서 나의 값어치를 증명해야만 한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대학강단에 따뜻하게 있다고 해서 하이에크가 이런 현실을 몰랐던 게 아니었다. 현대의 경쟁사회가 말로만 경쟁사회라는 데에 포인트가 있다. 그는 계획경제를 비판하는 논리를 자유방임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적용한다. 독점자본들과 그에 호응하는 세력(하이에크는 이를 진영논리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진영논리의 기만적인 측면에 주목한다.)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며 경쟁의 원리를 파괴해왔다는 것이다.

국가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합리적으로 방어될 수 있는 체제는 없을 것이다. 효과적 경쟁체제는 그 어떤 다른 것만큼이나 현명하게 제정되고 지속적으로 조정되는 법적 틀을 필요로 한다. 경쟁이 적절하게 작동하기 위한 가장 본질적인 전제가 사기나 (무지한 사람에 대한 착취를 포함한) 기만의 방지이다. 이것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결코 완전히 성취된 적이 없었던 입법활동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제3장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p.81

여기(가격시스템)에서 중요한 점은 경쟁이 지배적일 때에만 즉, 개별 생산자가 가격변화에 적응해야 하고 이 변화들을 통제할 수 없을 때, 가격시스템이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 '제4장 계획의 '불가피성'?', p.94

이로부터 하이에크는 1) 국가활동과 입법의 범위 제한, 2) 포괄적 사회보험 시스템의 구축, 3) 지방자치를 통한 개인들의 정치참여, 4) 경제적 이해관계를 억제할 수 있는 국제적 질서의 수립 등으로 개략적인 밑그림을 그려 나간다. 그럼 간략하게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일단 하이에크는 법에 따른다고 해서 합법은 아니라고 믿었다. 민주주의도 하나의 제도일 따름이므로, 절차적 정당성만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령 히틀러의 경우 민주적으로 선출되어 법적 절차에 따라 통치했다. 유대인 학살마저도. 따라서 국가의 활동이나 법은 개인적인 도덕감정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보편적 윤리와 장기적인 전망에 근거해야만 한다. 특정한 효과를 목표로 하는 국가적 활동은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국영기업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하이에크는 도로, 항만, 전기 등과 같은 사회인프라에 대해서는 독점의 필요를 인정하지만 국가의 직접적인 운영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국가권력이 낙하산을 내려꽂으면서 전횡을 펼치더라도 대처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는 거다. 다만 그 해법을 민영화에서 찾았다는 게 문제. 하이에크는 민영화가 효율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졸라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다. 그렇지만 강력한 가격통제와 감시로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는데… 국가가 더 이상 자본을 통제할 수 없는 현재에는 유효하지 않은 이야기. 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그러지 않을 것 같다는 건 혼자만의 느낌적 느낌.

사회보장 역시 보편성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 '건강과 일할 능력을 보전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최소 수준의 음식, 주거 및 의복'을 비롯, 질병이나 사고처럼 '보험을 들 수 있는 종류의 위험'을 다루는 경우에는 '사회보험의 이름 아래 경쟁을 다소 작동하지 않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는 조치들이 도입될 수도 있다'('제9장 보장과 자유', p.186-187). 하이에크는 이를 '포괄적 사회보험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씨바, 이 대목에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도 종북좌빨이었다니…. 글타. 하이에크는 보장이 특권이 되지 않도록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져야 한다는 점만 경고할 뿐, 불평등은 생활수준의 문제로 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화요트를 타고 로마네 콩티를 마시고 싶다면, 뭐 좋다. 하지만 기본적인 생계에다 경쟁논리를 적용하는 뻘짓거리는 하지 말라는 것.

슬슬 투척한 떡밥들이 거의 회수되어 가는 것 같다. 어쩌면 "노예의 길"에서 가장 핵심적이자 논쟁적인 부분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 중 하나가 지방자치이다. 아니, 이미 하고 있지 않냐고 물으신다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하이에크는 고작 투표권에 만족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사실상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내어 보인다. 경제와 마찬가지로 정치도 일상의 영역이기에 소수의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둬서는 곤란하다는 거다. 사회적 의사결정과정은 모든 시민의 참여 아래 이루어져야 했다. 그의 논리는 간명하다. 개인들이 윤리적이기를 바라기 전에, 우선 그럴 수 있는 공간부터 제공하라는 것이었다.

만약 모든 권력과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이 보통사람이 조사하거나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큰 조직에 의해 장악되었다면, 우리는 조금이라도 민주주의를 보존하고 성장하도록 할 수 없다. 장래의 지도자들에게뿐만 아니라 일반국민들에게 정치적 훈련의 학습장이 되어 주는 충분한 지방자치가 없이는, 그 어느 곳에서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했던 적이 없었다. 보통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므로, 오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숙한 문제들에 대해 책임감을 배우고 실천해 볼 수 있는 곳에서, 오직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라기보다는 나의 이웃이 있다는 의식이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 주는 뜻에서 그들은 공공의 문제에 대해 진정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 '제15장 국제질서의 전망', p.321

마지막은 초국가적 단위의 국제적 법치질서의 수립이다. 하이에크는 국가들간의 관계에서 자유방임의 폐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보았다. 힘센 놈이 약자를 털어먹는 게 결국 그간의 국제질서였다는 것이다. '세계화'란 FTA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국가 내에서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국가들 간의 불평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국가들 사이의 이해관계, 특히나 강대국들의 이해를 억제할 수 있을만한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이에크도 이러한 제안이 이상주의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물며 피케티도 고작 글로벌 부유세 같은 온건한 대안을 제시하면서도 조심스러워하니까. 하지만 하이에크는 국제질서가 약육강식의 논리에서 탈피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위아래로 국가권력에 대한 이중의 안전판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나치를 피할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물질적 상황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분야에서 우리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자유',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을 우리 자신의 양심에 따라 꾸려간 결과에 대한 '책임', 이 두 가지가 그 속에서 도덕적 감성이 자라날 수 있고, 도덕적 가치들이 개인의 자유로운 결정 속에서 날마다 재창출되는 토양이다. 자신의 상관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대한 책임, 강제에 의해 강요되지 않은 의무에 대한 인식, 가치 있게 여기는 것 중 다른 사람을 위해 어느 것을 희생할지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른 결과의 감수와 같은 것들이야말로 바로 도덕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도덕의 본질 바로 그것이다.
- '제14장 물질적 조건과 이상적 목표들', p.294

케인스가 "노예의 길"을 읽고 깊은 동감을 표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은 '거봐, 공산주의 망했잖아. 지금이 좋아. 대안 같은 건 없다니까? 케인스도 인정했다구'로 어처구니 없이 요약되어 왔다. 물론 하이에크가 비판 받을 부분이 없다는 건 아니다. 70년대 이후 그의 행보가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쉴드쳐주기에는 독단적인 정부들에게 지나치게 협력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자본의 힘이라든지, 경제적인 불평등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 등을 과소평가하기도 했다. 졸라 완고한 전통주의자라서 좀 꼰대스럽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하이에크는 '옆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조장하는 게 전체주의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는 거다. 국가는 합법이라는 이름 하에 전지자처럼 행세하라고 있는 게 아니었다. 시장이 소수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견제하고 사람들에게 이웃들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었다. 자유는 각자 알아서 혼자 살아남으라는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 나오는 구절로 끝맺고자 한다.

국가의 가치란 궁극적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가치다.
존 스튜어트 밀 지음, 김현욱 옮김, "자유론", ‘제5장 적용’, 동서문화사, p.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