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필요해. 더없이 진지한 이 책의 결론은 결국 이렇게 요약될 수 있겠다. 하버마스에게 의사소통은 일방적인 주장이나 평가, 명령 등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대화는 대화에 참여하는 참여자로서의 자세를 요구한다. 발언의 타당성은 합리적인 근거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고, 이는 발언의 근거에 대해 비판가능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근거제시가능성과 비판가능성. 이 두 가지 조건은 의사소통의 합리성에 있어 바탕이 된다.

합리적 발언의 합리성이 근거제시 가능성에 있다면 합리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의 합리성은 자신을 비판에 노출하고, 필요하면 논증에 적절히 참여하려는 자세에 있다고 하겠다. 합리적 발언은 비판가능성 때문에 또한 개선 가능하다.
-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장춘익 옮김, "의사소통행위이론 1 : 행위합리성과 사회합리화", '1. 서론: 합리성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들 ', 나남, p.58

하지만 의사소통의 합리성은 과학의 합리성과는 다르다. 대화는 무언가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게 아니며, 기본적으로 사람들끼리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가령 '아프다'와 같은 표현을 과학적인 합리성에 따라 따져묻기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도덕이나 법, 혹은 예술이라든지 그 밖의 일상적 의사소통 등에서 과학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합리적이라 할 수는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버마스는 현대문명의 비인간성을 발견한다. 가치판단이나 진정성의 영역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과학의 잣대로 해석하려 한다는 것이다.

화폐나 권력은 언어적 합의형성 과정을 회피한 채, 계산 가능한 가치의 크기에 따라 목적합리적으로 처신하도록 행위를 코드화하고, 다른 상호작용 참여자들의 결정에 대해 일반화된 전략적 방식에 따라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들은 언어적 의사소통을 단순화할 뿐만 아니라, 손해와 보상의 상징적 일반화를 통해 대체한다. 그래서 항상 상호이해 과정의 터전이었던 생활세계적 맥락은 매체에 의해 조절되는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가치를 잃어버린다. 생활세계는 행위조정을 위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 "의사소통행위이론 2권 :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 '6. 제2중간고찰: 체계와 생활세계', p.287

하버마스는 사회를 생활세계와 체계로 구분지은 후, 생활세계를 언어에 의해, 체계를 매체(화폐나 권력)에 의해 조정되는 메카니즘으로 설명한다. 생활세계는 사람들 사이의 이해를 지향하는 문화의 영역이다. 반면 체계는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중심을 두는 물질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생활세계가 체계에 의해 그 영역을 침범받으면서 사회는 파편화되고 전통이라든지 문화적 지식 등도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개인의 정체성이란 것도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매체는 맥락을 지루해할 뿐더러, 사실상 구구절절한 사연 따위엔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책임능력이란 것이 자신의 행위를 비판 가능한 타당성 주장에 맞출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의사소통적으로 이룩되는 합의로부터 분리된 행위조정은 더 이상 책임능력을 가진 상호작용 참여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7. 파슨스: 사회이론 구성의 문제', p.412

"의사소통행위이론"은 분배구조의 개선만으로 현대사회의 공허함이 해결되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점차 언어가 '가치중립적'인 척 하거나 혹은 '과도한 친밀감'으로 장식되면서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데에 있다. 공론의 영역은 물론 사적인 영역에서도 개인들은 참여자가 되지 못한다. '객관적으로', '신속하게', '유불리를 판단하는', 공급-수요 관계의 어디쯤에나 위치할 수 있을 뿐이다. 생활세계의 회복,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이성으로부터 추방당한 합리성들을 복권하는 것, 하버마스는 먼저 서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대문명의 병리적 현상을 치유할 수 없으리라 전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