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아니, 자신이 경험했던 것조차도 과연 나는 자신있게 이것에 대해 아노라고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책은 나쁘다(부디 이 말이 이상하게 인용되지 않기를, 그럴 일도 없겠지만). 크게 좋은 일을 해본 적은 없지만 그런 대로 선량하기는 하다고, 부끄러울 정도로 부족하나마 그래도 간단한 의견 정도는 말할 수 있을만한 지성은 갖추었노라고, 그런 종류의 나에 대한 믿음들을 여지없이 흔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나치의 폭력에 노출되었던 한 인간의 담담한 증언이자, 또한 동시에 적어도 내게는 비겁하고 비루한 스스로의 모습과 마주쳐야 하는 고통이기도 했다.

라거(나치 강제수용소)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사회에서 특권층의 부상은 걱정스럽지만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이다. 특권층은 유토피아에만 없다. 모든 부당한 특권에 대항해 전쟁을 하는 것은 의로운 인간의 과제이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수 또는 한 사람이 다수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는 곳에서 특권은 태어나고, 권력 자체의 의지에 반하면서도 특권은 증식한다.
-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2. 회색지대', 돌베개, p.46

프리모 레비는 자신이 겪어야 했던 고초에 대한 분노를 토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는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왜 자신이 살아남았는지부터 묻는다. 가라앉은 자들 중에는 좋은 사람이 많았다. 사실상 좋은 사람들부터 가장 먼저 가라앉았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고, 비교적 뒤늦게 수용소에 들어갔으며, 독일인의 언어를 배울 기회가 있었고, 우연찮게도 그들에게 유용한 직업군에 속했으며, 그리고 다행히도 생존만을 신경쓰기에도 벅찬 하루하루였다. 어떠한 정당화나 미화의 유혹도 뿌리친 채 그는 이러한 '특권들'을 누릴 수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노라고 담담하게 고백한다.

그렇다. 프리모 레비는 이런 것들을 특권이라 부른다.

의사소통이 금지된 나라에서는, 또 그런 시대에는 다른 모든 자유도 곧 시들게 된다. 토론은 영양실조로 죽게 되며, 타인의 견해에 대한 무지가 만연하고 강요된 견해들이 맹위를 떨치게 된다. … 비관용은 검열의 경향을 띠고, 검열은 타인의 논지에 대한 무지, 즉 비관용 자체를 증폭시킨다. 이것은 깨기 어려운 단단한 악순환의 고리이다.
- '4. 소통하기', p.124

분노? 슬픔? 허무? 답답함? 씁쓸함? 착찹함? 비참함? 부끄러움? 역겨움? 수치심? 좌절감? 안타까움? 그리 길지도 않은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여러 가지의 감정이 동시에 오간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찬찬히 읽어나가다 보면, 그는 마치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결같이 차분한 표정을 지어보이지만, 강제수용소에서의 시간을 평생에 걸쳐 곱씹고 또 곱씹기를 반복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분명 프리모 레비는 나치로 인해 고통받은 피해자이다. 그런데 왜 그가 계속해서 과거를 되짚고 고민하고 또 변호를 해야 했는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치는 그에게 있어 그림자와 같다.

비인간적인 체제는 자신의 비인간성을 사방으로, 특히 낮은 곳을 향해서 퍼뜨리고 확장한다.
- '5. 쓸데없는 폭력', p.135

그는 자신이 구조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다. 굶주림 때문에 빵 한 조각을 탐내었다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다. 동물처럼 자신을 대하는 이들 앞에서 무력하게 동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풀려나고 다시 '인간'이 되었을 때 뒤늦게 찾아온 수치심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사는 정말 나치의 만행에 대해 온당하게 심판을 내리고 있는 것일까. 과연 나치는 인류사에서 다시는 유례가 없을 하나의 우발적인 사건에 불과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라면 나이가 들수록 왜 '악의 평범성'이 점점 무섭게 다가오는 것일까.

Nicht Sein Kann, was nicht sein darf.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상징시에 담긴 내용은 이렇다. 법률을 극도로 준수하는 독일시민 팔름슈트룀Palmström은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있는 길에서 자동차에 치인다. 그는 상처투성이로 일어나서 생각한다. 차량 통행이 금지되었다면 차들은 다닐수 없다. 즉, 차들은 다니지 않는다. 그러므로 차 사고는 일어날 수가 없다. 이는 '불가능한 현실', 운뫼클리헤 타트자헤Unmögliche Tatsache이다(시의 제목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단지 꿈을 꾼 것임에 틀림없다. 바로, "그 존재가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상황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이 다 벌어진 뒤의 뒤늦은 깨달음과 고정관념들을 경계해야 한다. 더 일반적으로는, 오늘날 여기에서 통용되는 잣대로 멀리 떨어진 시대와 장소를 판단하는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이것은 시간적·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피하기가 더 어려운 오류이다.
- '7. 고정관념들', p.201

그의 말처럼 나는 그의 경험을 알 수는 없다. 그저 이해하려 노력하거나, 혹은 그런 척 할 수 있을 뿐이다. 프리모 레비는 끝끝내 인간을 용서할 수 없었고, 자기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간은 자기자신에게만큼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관대한데 왜 당신은 그럴 수 없었느냐고, 솔직히 항변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살아남은 자는 모두가 구조된 자이다. 구조된 자들은 가라앉은 자의 고통을 결코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