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나는 나 자신이 겪은 경험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현재의 시간, 2014년. 하지만 현재는 현재로써만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현 시대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경험은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것, 과거는, 좋든 싫든, 엄연한 현실이었으며 결코 지워지지도 않는다는 것, 그리고 20세기는 여전히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기엔 너무나도 사적인 경험들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파괴, 보다 정확히 말해서 한 사람의 당대 경험을 이전 세대들의 경험과 연결시키는 사회적 메커니즘의 파괴는 20세기 말의 가장 특징적이고 가장 섬뜩한 현상들 중 하나이다.
- 에릭 홉스봄 지음, 이용우 옮김,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20세기 개관', 까치, p.15

에릭 홉스봄이 묘사한 20세기, 1914년부터 1990년까지의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사회의 종말이다. 시대 3부작("혁명의 시대" - "자본의 시대" - "제국의 시대")에서 근대화를 사람들이 삶의 터전에서 추방당하고 공동체적 안전망이 해체되는 과정으로 보여주었던 그는, 이 과정이 어떠한 결과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완수되었는지를 "극단의 시대"로 설명하려 한다.

첫 시작은 "제국의 시대"의 끝자락을 알린 1914년의 전쟁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두 번의 세계대전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었다. 기존의 제국과 새로운 제국을 꿈꾸는 나라들, 그리고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식민지들이 한데 뒤엉킨 전쟁이었고, 어느 편이든 '완전한 승리'를 위해 총력을 다하고 그로 인해 자멸하게 되었던 전쟁이었다. 사회주의는 시작부터 비틀거리거나 최소한 무력했으며, 갑자기 닥쳐온 공황에 시장은 점차 과격해지는 민족주의로 뒤덮히게 되었다. 실제로 잠깐이나마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도 나치를 새로운 대안으로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일부 식민지 국가들의 경우엔 반제국주의의 구원자로 여기기도 했었다.

정치의 실패. 1914년부터 1945년까지의 극단은 내부와 외부, 양면으로 실패했던 각국의 정치상황에 기인한다.

이러한 운동들(급진적 우파; 인종주의와 같은)의 공통된 접합제는, 한 쪽의 바위 같은 대기업과 다른 한 쪽의 확고한 지위를 가진 부상하는 대중적 노동운동이 양쪽에서 자신들을 압박하는 사회에서 느끼는 소시민들의 분개였고, 최소한 과거에 자신들이 차지했던 그리고 자신들의 정당한 몫이라고 믿었던 상당한 사회적 지위 또는 자신들이 열망할 권리가 있다고 느낀, 역동적 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박탈해버린 사회에 대한 분개였다.
- '제4장 자유주의의 몰락', p.171

20세기 전반기의 실패는 1945년 이후의 전방위적인 장례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1919년의 패전국 터키와 오스트리아처럼 1945년의 승전국 영국과 프랑스도 더 이상 제국을 유지할 수 없었고, 문화·사회적으로는 전쟁으로 희생을 감내했던 민중을 더 이상 침묵시킬 수도 없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었고, '사회란 존재하지 않고, 개인들만이 존재하는(마거릿 대처)', 또 다른 혁명의 시대였다.

가난하고 생활비가 부족한 기혼여성들이 1945년 이후에 일하러 나간 이유는 거칠게 말하자면, 아이들이 더 이상 일하러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방에서 아동노동은 거의 사라졌던 반면, 자녀들의 처지개선을 위해서 교육을 시켜야 할 필요성 때문에 부모들의 재정부담은 과거보다 더욱 커졌고 그러한 부담을 지게 되는 기간은 더욱 길어졌다.
- '제10장 사회혁명 : 1945-90년', p.441

하지만 기존의 도덕률이 폐기된 장소에는 익명성만이 남게 되었다. 개인의 안전을 보호해줄 수 있는 장치들은 사라져버렸고, 삶의 불안과 공포가 증대해갔다. 혈연이나 지연으로 얽힌 구식의 세계는 물론, 국민국가도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19세기, 과학이 기독교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던 바로 그 순간, 회의주의가 도래했듯이, 20세기에는 '그렇다면 과연 누가 신의와 계약을 보장할 수 있는지'가 즉각적인 문제가 되었다. 20세기 전반기의 정치의 실패는 20세기 후반기의 정치의 회피로 이어졌다. 사회적 합의의 부재가 20세기 후반기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공동체와 가족이 쇠퇴하는 세계에서의 삶의 물질적 이점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거의 인식되지 않은 사실은 20세기 중반까지 현대 산업사회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오래된 공동체적, 가족적 가치관과 새로운 사회의 공생에 의존해왔던가라는 사실과, 따라서 그러한 가치관의 엄청나게 급속한 붕괴의 결과가 얼마나 극적인 것이 될 것인가라는 사실이었다. … 20세기 세기말의 슬픈 역설은, 사회적으로 퇴보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사회구조를 보유한 북아일랜드-내전에 가까운 상태를 20년간 한 해도 쉬지 않고 겪고 난 뒤의-에서 실업자로 사는 것이 영국의 대부분의 대도시들에서 사는 것보다, 사회복지와 안정에 관한 측정 가능한 모든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더욱 낫고 실제로 더욱 안전하다는 데에 있었다. … 현실적인 모든 관찰자와 대부분의 정부가, 범죄자들을 처형하거나 장기징역에 처하는 방식으로 범죄를 줄일 수도, 심지어 통제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또한 모든 정치가가, 반사회적인 것들을 처벌하라는 보통 시민들의 대대적인 요구-이성적이든 그렇지 않든-의 감정 섞인 막강한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이상의 것들이 기존의 사회구조와 가치체계가 마모되고 해체되는 것의 정치적 위험성이다. 그러나 1980년대가 대체로 순수시장 지상권의 깃발 아래 전진됨에 따라, 그러한 마모와 해체가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 경제에게도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이 갈수록 명백해졌다. … 우리가 숨쉬고 있고 우리의 모든 활동을 가능케 하는 공기를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듯이, 자본주의는 그것의 작동이 이루어지는 환경, 그것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공기가 희박해졌을 때에야 비로소 자본주의는 그러한 환경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발견했다. 바꾸어 말하면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었기때문에 성공했다. 이윤의 극대화와 축적은 자본주의 성공의 필요조건이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 '제11장 문화혁명', p.471-475

에릭 홉스봄이 묘사한 1914년부터 1990년까지의 세계는 기묘한 느낌을 준다. 지금 현재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마치 현재에 대한 예고편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극단의 시대"는 부모의 회고록일 수도, 혹은 부모의 부모의 회고록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시간은 결코 단절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