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으스스하다. 그렇다고 '이 소설은 호러다!'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농담이 되겠고, '나'라는 존재, 더 나아가 소위 '우리' 혹은 '우리 나라'라고 말해지는 것의 정체, 김연수 작가의 진짜 관심은 그쪽에 있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과거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현재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는 사람, 더 정확히는 타인들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나'는, 한국전쟁을, 제국주의의 열망이 밀어닥쳤던 개화기를, 자존심을 위해 뒤쳐진 이들을 과감히 버려야 했던 88올림픽의 그 때를 방황하다, 그리고는 어느샌가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가 일제강점기를 거쳐 반공주의가 태동되었던 휴전 직후로 이어지는 커다란 역사의 길을 성큼성큼 내딛는다.

저는 뭐라고 외치며 죽어야만 하겠습니까? 제발 알려주십시오. 제발.
- 김연수 지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 창비, 2005, p.250.

그동안 '나'는 앞으로 내가 무엇을 이루어갈 수 있을까에만 관심이 있었다. 현재 걷고 있는 이 골목길도 목적기에 도착하기만 하면 곧 잊어버릴, 아무런 의미없는 길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나'일 뿐 다른 이가 아니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나'를 증명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그 길에서 이미 헤어진 옛 사랑을 다시 마주치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시계바늘을 앞으로만 계속해서 돌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함께 거닐었던 길에 아로새겨진 추억들, '우리'가 도대체 왜 헤어졌던 것일까를 대답할 수 없는 현재. 다시금 홀로 그 길을 되짚어보지만 이미 사라진 기억을 되살리기란 도무지 어렵기만 하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던가,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선택들을 하고, 또 왜 그랬던 것이었을까. 김연수 작가는 '나'라는 사람은 누구인지, 정녕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가 없다면 최소한,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던지에 대한 답만이라도 얻기 위해 동분서주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쓰고 열심히 걸어보아도 오랫동안 길 위에 버려져있던 기억들은 희미한 자취를 남긴 채 조용히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저 서로를 짐작할 뿐이었다.
- 같은 책,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p.143.

"사생활의 역사"를 읽고 있는 도중에 이 책을 선물받았다는 건 정말이지 공교로운 일이었던 것 같다. "사생활의 역사"의 저술에 참여했던 조르주 뒤비가 본문 내에서 직접 인용되기도 할 뿐더러, 역사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역시 하나로 맞닿아진다. 줄리언 반스가 "10 1/2장으로 쓴 세계역사"에서 품었던 의심들, 루이스 세풀베다가 보여주었던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에 이어, 김연수 작가는 '나'를 되찾으려고 한다. 혹여 '나'라는 존재는 끝없는 미래 속에서 이미 잊혀져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서글픈 의심을 품고선.

그래서인지 이 단편집의 표지에 약간쯤은 아쉬운 기분이 든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보다는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쪽이 좀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