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각오는 했던 터였다. 그럼에도 우선 아, 정말 힘들었다라는 투정부터 할 수 밖에 없겠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적어도 2~3시간씩 붙잡고 있었으면서도 거의 2달이란 시간이 흘러버렸다. "사생활의 역사"는 결코 한 입에 삼켜낼 수 없다. 조급증을 버리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금씩 버텨내다보면 어느새엔가 '역사'라는 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삶이란, 어찌 이렇게 다르면서도 같은지..."라는 카피문구보다 이 책을 더 잘 소개하기란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투박하게나마 요약하자면, 공적생활과 사생활의 구분이 모호하거나 거의 없었던 삶으로부터(1권), 점차 가족을 중심으로 사생활의 담장이 세워지는 과정을 거쳐(2권, 3권, 4권), 가족의 담장으로부터 탈출하는 개인들(5권)로 마무리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는 문자의 보급, 국가의 역할, 종교적 태도 등의 세 가지 중대한 변화(3권)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개인적으로 "사생활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상속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마르크 블로크의 "봉건사회"(참고: "2권"에서 중요하게 언급)를 읽으면서도 느꼈던 의문이지만,
전인류에 걸친 갈등의 본질에는 어쩌면 상속이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시대에 가문(확대가족)의 재산을 증식하고 그 이름을 잇기 위한 노력은 회사의 생존과 이윤창출을 위해 경영자들이 노력하는 모습과 거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재산으로 충성심을 구매했던 봉건제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도 재산과는 달리 충성심은 상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가문이 가족으로 전환되는, 중세부터 르네상스에 이르는 그 지난한 과정 역시 점차적으로 상속에서 혈통이 중요해져가는 것과 그 궤를 함께 하고 있다. 어쩌면 근대성을 이루는 가장 주요한 개념 중 하나인 민족주의를 상속의 집단화 혹은 추상화로 설명할 수 있지는 않을까, 탄생과 결혼, 죽음과 대단히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교적 예에서도 결국 그 중심에서는 상속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본다. 굳이 약간 악질적으로 말하자면 3년상 등으로 상징되는 효의 중시는 앞선 세대에서 구축한 재산을 날로 먹을 생각 따윈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현대사회에 들어 평균수명의 증가와 더불어 그 중요성이 감퇴되기는 했지만(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노인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리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 중세나 근대에서도 수명이 길어질 경우 일찌감치 상속을 마치는 대신 노후를 보장받으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여전히 상속은 갈등의 중요한 지점들 중의 하나이다.

"모든 가족이 비극적이지는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비극은 가족 문제에 관한 것이다."
- 필립 아리에스, 조르주 뒤비 책임 편집, 미셸 페로 편집, 전수연 옮김, "사생활의 역사 4 : 프랑스 혁명부터 제1차세계대전까지", 새물결, p. 384, 트리코의 "비난"에서의 인용 중에서 재인용.

그리고 가부장제에 대한 신선한 해석도 꼽아볼 수 있겠다. 앞선 상속의 문제와 맞물려, 꽤나 오랫동안 가부장제 질서가 유지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질서가 엄격하게 지켜졌다고 볼 수는 없다는 지적이었다. 내외 간의 구분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이라기보다는 가정의 담장을 경계로 한 권력의 구분에 가까웠으며, 장자상속이라는 것도 꼭 그렇게 지켜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사실상 일반적인 상속형태도 아니었다고 한다.

특히나 가부장제 질서의 본격적인 시작을 프랑스대혁명으로 보는 견해는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가문으로부터 가족으로의 대체가 완성되면서 남성들은 어느 때보다도 혈통을 중시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여성들을 의심스러운 존재로 규정하고 시민에서 제외하려는 의도를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가부장제에 의해 오랫동안 지배되어온 한국사회라는 관념에 대한 의문과 함께 다시금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참고: "3권"에서 중요하게 언급)을 떠올리게 되었다.

"문명화과정"에서는 상류층으로의 신분상승을 꿈꾸었던 중류층이 그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그러한 중류층의 태도가 점차 사회전반으로 퍼져가는 것을 문명화의 핵심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궁정사회는 이러한 계층간의 교류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따라서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는 신분상승의 기회는 커녕 계층 간에 교류할 기회조차도 드문 만큼 지배계층에서 받아들여지는 가치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경제적 붕괴가 본격적인 가부장제의 시작을 낳았다는 가설은 둘째치더라도, 조선이 쇠퇴할 때까지 한국사회는 상당히 엄격한 신분질서에 기반한 사회였고, 따라서 구성원의 절대다수를 이루었던 일반농민들의 사회가 과연 가부장제에 의해 지배되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일상의 곳곳에 파고들어 사회통제기능을 수행했던 서구의 기독교조차 여론을 주도하기보다는 그저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끌려다니기가 일쑤였다고 하니, 불교든 유교든, 지배계층의 이념이란 고작해야 3% 내외의 지배계층 내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이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대가족과 핵가족의 관념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분석도 기억해둘만 하다. 서구사회에서 대가족이 사회의 대세를 이루었던 적은 사실상 없었다는 것이다. 대개 가족구성원의 숫자는 3~4명 안팎만을 오갈 뿐이었다. 19세기 후반까지도 프랑스인의 평균수명은 겨우 47세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3세대 이상으로 이루어진 가족은 그다지 흔하지 않았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상당한 여유재산을 갖춘 가문이 아닌 이상, 형제자매 등의 친족들이 함께 모여산다는 것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토지에 기반한 농경사회라면 더더욱) 불가능했다.

이 역시 한국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지 않았을까. 핍박받는 며느리의 신화도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대적으로 오래 살 확률이 높았던 상류층에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례였을 것 같다. 가족문제란 결혼 전에는 자신의 부모와의 사이에서, 그리고 결혼 후에는 배우자의 부모보다는 배우자 자체나 자녀와의 사이에서 주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사생활의 역사"는 그 제목에 걸맞게 의복과 집, 음식을 비롯, 요람에서 무덤으로 이르는 과정, 기타 등등 다종다양한 사생활의 소재들을 끌어모아 각 시대를 펼쳐보인다. 게다가 이 시대는 이런 시대, 저 시대는 저런 시대라는 단순한 일반화 대신, 상류층과 중류층, 하류층 등 각계각층으로 구분되는 각각의 삶의 양태들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통해 삶의 다양성을 드러내려는 노력 역시 여실히 엿볼 수 있다.

다만 역시나 프랑스를 중심으로 간간히 이탈리아, 독일, 영국 등의 서유럽을,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더해지는 미국과 스웨덴까지, 오로지 서구사회만을 연구대상으로 한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 어떤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세세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주관적인 시각이 강하게 드러나는 등, 다수의 작가에 의해 쓰여졌기에 아무래도 전반적인 내용에 있어서 다소 일관적이지 않기도 하다. 또한 마지막권인 "5권"에서는 이 책이 30여년전에 나왔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

하지만 역사란 언제나 미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짜여진 신중한 구성이 돋보일 뿐더러, 저자들마다의 다양한 시각이 스며들어 깊이를 더했다고 바꾸어 말하고 싶다.

마지막 한 마디. 죽기 전에 꼭 한 번쯤은 읽어봐도 좋겠다. 여러 번 읽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아무래도 두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