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정말 지독히도 변할 줄을 모른다. 운명, 환경, 유전자 등등 이름은 바뀌어왔지만, '자유의지'란 그럴 듯한 단어는 항상 이미 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하긴 의지란 단어 자체가 이미 있는 것들을 필요로 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끊을 수 없는 악순환. <스타워즈(Star Wars Episode V: The Empire Strikes Back, 1980)>에서의 'I'm your father'도, 한국의 숱한 드라마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가족의 테마도, <에반게리온(Neon Genesis Evangelion, 1995)>에서 아버지를 싫어하는 아이들도, 삶이 얼마나 바뀌기 어려운지를 말할 뿐이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그 개 눈을 한 여인은 내가 하데스의 집으로 가는데도 내 눈을 감겨주려하지 않았소. (As I lay dying, the woman with the dog's eyes would not close my eyelids for me as I descended into Hades.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11권 '저승', 424~426행 ※ 역본마다 다소 문장의 차이가 있으며, 번역은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2006, p. 256을 참고하였음.)

그래서 삶의 변화를 꿈꾸는 이들이 그렇게나 죽음을 예찬해왔는지도 모른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를 마치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것처럼 보이고, 바그너 또한 지크프리트를 어떻게든 죽이려고 했으며, 랭보는 아예 교수대 위에서 감격의 시를 읊기까지 한다. 하지만 아무리 금빛으로 덮어도 죽음은 차디차고, 삶은 여전히 관성 위에 올라탄 채 내리지 않는다. 완전한 비극도, 완전한 희극도 될 수 없는 삶.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의 '죽음'은 전혀 숭고하지도 우습지도 않다.

이 고장에서는 바로 그게 문제다. 날씨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도 너무 오래 머물러 탈이다. 강이나 땅처럼 불투명하고, 느리고, 때로는 폭력적인 것들이 어찌 할 수 없는 운명으로 천천히 인간의 삶을 형성하고 창조해 내고 있는 것이다. (윌리엄 포크너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피바디', 김명주 옮김, 민음사, p.54)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As I Lay Dying, 1930)"는 미시시피의 요크나파토파(Yoknapatawpha County)라는 가상적인 마을에 살고 있는 여느 한 가정주부의 죽음을 바라보는 주변인물들의 독백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 남편의 아내이자 다섯 아이의 어머니인 애디 번드런(Addie Bundren)의 죽음.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며 가족들에게 자신을 집에서 40마일이 떨어진 강 건너의 마을에 안장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가족들과 이웃들은 그녀의 유지를 지켜주고자 함께 짧지 않은 여정에 오르게 된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고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일은 다른 게 아니라 빨리 땅속에 묻어주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같은 책, '샘슨', p.133)

하지만 동상이몽이라는 말도 있듯, 여정을 함께 하는 혹은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애디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모두 저각각이다. 남편 앤스(Anse Bundren)은 애디의 죽음이 자신이 의치(義齒)를 해넣는 데에 어떠한 금전적 영향을 미칠지 전전긍긍하며, 장남 캐쉬(Cash Bundren)는 어머니를 안장하기 위한 관을 만들면서도 그녀의 죽음보다는 관의 완성도에 더욱 관심이 많고, 딸 듀이 델(Dewey Dell Bundren)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남자친구 생각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던가. 가족들조차 이러한데, 당연히 생판 처음보는 낯선 사람에게 애디의 죽음이 큰 의미를 지닐 리가 없다.

집에서 짜 만든 관, 그 위에 누워 있는 다리 부러진 남자, 그리고 앞자리에 앉은 아버지와 작은 소년을 보며, 사람들은 그들이 마을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모두 산산조각 나버리지 않을까 공포에 질려있었다. 그래서 경찰관은 그들이 한시라도 빨리 마을을 떠나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책, '모슬리', p.235~236)

비록 허무할지라도 간결한 문체로 삶에 저항하려 했던 헤밍웨이와는 달리, 포크너는 변하지 않는 삶의 풍경을 좀처럼 끝나지 않는 방만한 문체로 그려낸다. 자신의 뿌리를 완전히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못한 채 성에 그저 'u'자 하나를 더했을 뿐인 미국 남부 미시시피 출신의 알콜중독자. 윌리엄 포크너는 끊임없이 죽음을 말하지만, 부조리한 삶의 순환은 끝내 끊어지지 않는다. 그에게 '그래서? 어찌하란 말이냐'라고 묻는다면 우문이 될 것이다. 그는 단지 삶에 실망하고 분노하기를 바랄 뿐이다.

캐시를 임신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사는 일이 힘들다는 것을 실감했고, 임신이 바로 그 증거임을 알게 되었다. 말이란 전혀 쓸모없다는 사실도 그 때 깨닫게 되었다. 말하려고 하는 내용과 내뱉어진 말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캐시가 태어났을 때, 모성이란 말은, 그 단어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 살아 있는 이유는 죽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고 아버지는 말하곤 했다. (같은 책, '애디', p.198~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