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속에서는 많은 의미가 중첩되어 나타나기에, 미리 논의를 한정짓기 위한 테두리를 쳐두려고 한다. 이번 리뷰에서는 "죄와 벌"속에서 나타나는 가족이 가지는 딜레마에 대해 집중할 생각이다. 개인의 양심에 관한 문제, 윤리적 테마, 당신의 시대상 속에서 묻어나는 사상 및 세대, 계층 간의 갈등 등의 문제는 일단 미뤄두기로 한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똑똑하고 지적이며 냉철한 청년 라스콜르니코프가 어떤 전당포의 노파를 살해하게 되는 과정과, 그리고 그 이후에 겪는 심적 고통에 관한 이야기이다. 라스콜르니코프는 촉망받는 대학생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가족의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한다. 한국의 옛날가족의 모습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되리라 생각한다. 촉망받는 아들과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가족. 당연히 어머니는 아들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라스콜르니코프는 그러한 기대들과 희생들을 몹시 부담스러워하며, 더 나아가 불쾌해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에 그의 연인 소냐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여성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직업도 수입도 없는 부모와 아직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몸을 판다. 그녀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는다. 단 하나의 희망은 그녀 자신의 종교적 믿음이었고, 하나님은 자신을 용서해주리라 믿는 것 뿐이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소냐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사고를 당했을 때 였다. 그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중상을 입은 그녀의 아버지를 집으로 데려다주고, 그가 사망하자 그녀의 어머니에게 생활비와 장례비까지 챙겨준다. 이 과정 속에서 둘은 서로를 알게 된다. 소냐의 아버지로부터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라스콜르니코프는 처음으로 소냐의 집에 찾아가 단 둘이 만났을 때 가혹한 질문을 던진다.

"그때 당신 아버님이 모든 걸 다 내게 말해 주셨지요. 아버님은 당신 얘기도 다 해 주셨습니다…. 당신이 여섯 시에 나가서 여덟 시가 지나서 집에 돌아온다는 것도, 카쩨리나 이바노브나(소냐의 어머니)가 당신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일도."
소냐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 중략 ...)

"그럼 당신은 그분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어머니를요? 네, 그야!" 소냐는 괴로운 듯 갑자기 팔짱을 끼면서 슬프게 말끌을 흐렸다. "아아! 당신이 그녀를…, 당신이 그녀를 아셨더라면. 어머니는 정말 어린애 같아요…. 그분은 머리가 돈 사람 같아요…. 너무나 슬픔에 지쳐서요. 전에는 참 지혜가 있는 여인이었답니다. 얼마나 마음이 넓으시고…, 얼마나 착하신 분이었는지 몰아요! 당신은 모르십니다. 아무것도…. 아아!" ("죄와 벌" 제4부 - 4 중에서)

소냐는 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아버지는 늘상 술에 취해 밖으로 겉돌았고, 그녀의 어머니는 계속되는 불행과 궁핍한 삶으로 인해 폐병과 정신착란증세까지 겪고 있었다. 소냐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감싸려 한다. 하지만 라스콜르니코프는 이어지는 질문으로 그녀를 더욱 곤혹스럽게 한다.

"카쩨리나 이바노브나는 폐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분은 곧 죽을 겁니다." 잠자코 있던 라스콜르니코프가 그녀의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말했다.
"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닙니다!" 소냐는 저도 모르게 그의 두 순을 잡았다. 마치 그런 말은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듯이.
"그 편이 오히려 낫지 않겠어요, 죽는 편이 말입니다."
"아니에요, 좋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놀라면서 엉겁결에 마구 되풀이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만일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아이들을 어디로 보낼 생각인가요, 당신한테 있는 게 아니라면?"
"아아, 전 모르겠어요!" 거의 절망에 빠진 소냐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마 이런 생각은 그녀의 머리 속을 수없이 스쳐 갔지만, 다만 라스콜르니코프가 그 생각을 끄집어내 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아직 카쩨리나 이바노브나가 살아 있는 동안 지금이라도 병에 걸려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면 그땐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는 무자비하게 몰아쳤다.
"아아 당신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럴 수는 없어요!" 소냐의 얼굴을 무섭게 놀란 빛을 띠면서 일그러졌다.
"어째서 그럴 수가 없다는 겁니까?" 라스콜르니코프는 가혹한 미소를 띠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무슨 보험에라도 든 것은 아니잖습니까? 만약 병이 난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식구가 모조리 거리로 동냥을 나간다, 그분은 콜콜 기침을 하면서 구걸을 한다. 그리고 오늘처럼 벽에다 머리를 부딪치기 시작하고 아이들은 울어 댄다…, 그러면 그분은 쓰러지고 경찰로 운반되어 간다, 그리고 병원에 가서 죽어 버린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걸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답답하게 죄어드는 소냐의 가슴에서 결국 이런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같은 곳)

라스콜르니코프가 잔인하게 그녀의 현실을 꺼내보이지만, 동시에 소냐도 가족으로 인해 파멸되어 가는 자신을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스콜르니코프가 이렇게까지 심하게 그녀를 다그치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가족으로 인한 부담감을 자신이 또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라스콜르니코프의 여동생이 자신을 위해 돈이 많다는 것 외에는 별볼일이 없는 자산가와 결혼하려 했기에 그가 갖는 심적 고통이 더욱 큰 것이다. 그는 소냐에게 무릎을 꿇고 말을 잇는다.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쓸데없이 남을 위해 자신을 죽이고 팔았기 때문이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당신이 그렇게 증오하는 진흙 속에서 살면서, '잠깐 눈을 떠 본다면', 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누구를 돕는 것도 아니고 또 어떤 불행에서 누구를 구해 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잘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이게 무서운 일이 아니란 말이오!" (같은 곳)

제4부 - 4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가족 때문에 고민하는 두 남녀의 오랜 대화 속에서 많은 담론들을 제시한다. 가족의 희생으로 살아가는 남성과, 희생의 바탕이 되는 여성. 희생하는 쪽도, 희생받는 쪽도 동시에 가지는 자기파괴적인 양상을 작가는 절묘하게 그려낸다. 희생 자체가 더욱 깊은 절망으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역설적인 상황, 함께 지옥으로 가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손을 놓을 수 없는 딜레마,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과정을 잡아내고 있다.

이 둘의 이후 상황은 더욱 흥미롭다. 라스콜르니코프는 스스로 가족을 멀리 하고, 소냐는 타의에 의해 가족과 멀어지게 된다. 소냐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 때 어떤 자선가에 의해(이에 대한 사정은 복잡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생략하기로 한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출구를 찾게 된다. 그녀의 부모는 죽고, 자선가에 의해 어린 아이들은 보호시설로 보내졌을 때야, 비로소 소냐는 자신을 얽어매고 있던 모든 족쇄를 풀 수 있게 된 것이다.

라스콜르니코프는 다시 가족들과 다시 가까이 하지만, 결코 자신을 위해 희생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는 어떠한 물음도 거부한 채 자신의 가족을 떠나 자수를 하고 먼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희생해야 할 대상을 잃어버린 그의 어머니는 결국 병에 들어 임종을 맞게 되고, 비로소 가족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된 라스콜르니코프의 여동생도 자신을 지극히 돌봐준 라스콜르니코프의 친구, 라주미힌과 결혼을 한다.

"죄와 벌", 이 책에서 라스콜르니코프와 소냐는 죄인이다.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집고 가기로 한다. 여기서 소냐가 죄인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몸을 팔아서가 아니다. 그것을 죄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좀 더 윤리적인 토론이 필요한 문제이다. 그녀가 죄인인 이유는 앞선 인용에서 라스콜르니코프가 지적했듯이, 타인을 위해 자신의 신념과 어긋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파괴가 또한 죄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파생될 수 있으며, 이론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대한 원전의 의미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죄인으로 규정지으려 한다.) 그리고 라스콜르니코프의 경우엔 좀 더 많은 원인이 있지만, 이 둘 모두 죄를 짓게 하는 공통분모는 결국 가족이다. 라스콜르니코프는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이들을 위해 죄를 지었으며, 소냐는 자신의 희생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죄를 지었다. 그리고 라스콜르니코프는 법에 따라 벌을 받고, 소냐는 라스콜르니코프의 유배지에서 함께 지내며 속죄의 시간을 갖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속죄의 기간이 끝나면, 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암시가 나온다. 이 장면 또한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희생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데에서 이러한 암시가 나올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죄와 벌"의 전반에서 나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이 충돌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이 불행해진다는 이율배반적인 상황묘사,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콜르니코프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어떤 사건이 가지는 양면성을 집요할 정도로 정교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