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영국귀족의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The Draughtsman's Contract, 1982)>에선 1694년 왕정복고기를 배경으로 사건해결을 위한 12개의 퍼즐이 주어지고, <고스포드 파크(Gosford Park, 2001)>에선 1932년 대영제국의 쇠퇴기를 배경으로 30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어지롭게 펼쳐진다.




문제의 퍼즐 : 살해된 저택주인

전원의 풍경에 자리잡은 고즈넉한 저택.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의 허버트 귀족부인(재닛 수즈먼; Janet Suzman)은 남편(데이빗 힐; David Hill)에게 선물할 그림을 얻기 위해 명성이 자자한 젊은 화가 네빌(안토니 히긴스; Anthony Higgins)에게 상당한 보수를 제시한다. 남편이 떠나있는 12일이라는 시간 내에 완성되어야만 하는 12장의 그림. 네빌은 빠듯한 시간을 곤란해하며 거액의 댓가 뿐만 아니라, 부인에게 자신의 성적욕망을 채워줄 것 또한 계약의 조건으로 집어넣는다. 마침내 명문화된 계약서를 채결한 네빌. 그는 저택의 사소한 곳까지 세세하게 지시를 내리며 까탈스럽게 화폭을 채워나가기 시작하지만, 저택의 곳곳에선 날이 갈수록 그의 통제와는 무관한 옷가지와 사다리 등이 차례차례 등장한다. 네빌은 의아해하면서도 있는 그대로를 담는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그림을 수정해나가게 되고, 그가 12장의 그림을 모두 완성하자마자 영지 안에서 남편의 사체가 발견된다.






<고스포드 파크>의 윌리엄 매코들 경(마이클 갬본; Michael Gambon)은 자신의 대저택에서 귀족들을 위한 사냥 파티를 개최한다. 윗층의 파티와 아래층의 파티. 겉으로는 즐거워보이는 귀족들의 파티에서 안주인 실비아(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Kristin Scott Thomas)의 매부 앤소니(톰 홀랜더; Tom Hollander)는 계속해서 매코들 경에게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하고, 아랫층에선 저택의 관리인 윌슨 부인(헬렌 미렌; Helen Mirren)과 요리장 크로프트 부인(에일린 앳킨스; Eileen Atkins) 사이의 묘한 알력관계가 펼쳐지는 등, 웃고 있는 낯빛 뒤의 각자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섥히며 각종 부탁과 협박, 다툼 등이 끊이질 않는다. 이튿날 이어진 사냥. 매코들 경은 귀에 총격이 스치는 우발적인 사고를 당하고, 그날밤의 연회에서 그는 안주인 실비아와 심하게 다툰 후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공간의 분할 : 안과 밖, 그리고 윗층과 아래층

영화의 네러티브엔 아예 대놓고 관심도 없는 두 감독의 작품이기에, 살인 사건의 흥미진진한 해결에 대한 기대는 처음부터 금물이다. 두 영화는 이야기보다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골격과 인물 간의 역학관계가 그 자체로 핵심에 자리잡는다. 장소의 대비는 역학관계를 설명해주는 1차적인 골격이 된다.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의 경우엔 저택 안은 귀족의 세계로, 저택의 바깥은 귀족이 고용한 화가 네빌의 세계로 대비된다.

"제가 심사숙고 하여 만든 지시 사항을 한치의 오차도 없도록 지켜주셔야 일이 수월해 집니다"

저택이 풍경을 담아줄 것을 요청받은 네빌은 저택 밖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다. 화폭에 방해되는 비합리적인 귀족의 권위는 저택 안에 머무른다. 귀족과 화가가 맺은 계약은 저택에 감돌고 있는 욕망과 시기심, 불륜의 방어막이 되어 권위와 합리성, 여성과 남성, 나체와 옷으로 재생되는 안과 밖을 구분한다.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가 저택 안팍의 은유로 공간에 의미를 부유한다면, <고스포드 파크>에선 윗층의 상류층과, 이들 각각의 상류층의 인물마다 배치되어있는 아래층의 시종들이 대비되며 이중의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여기 머무는 동안 아래층에서 시종들은 주인 이름으로 불리죠"

상류층들이 서로에게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시종들이 서로에게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상류층과 시종들이 맺고 있는 관계, 이 세 관계는 명확하게 분리되면서도 자유롭지는 못하다. 윗층의 상류층들의 이해관계는 아래층의 시종들의 눈에 띄이고, 이는 아래층에서 시종들의 화제가 된다. 상류층은 이야기의 중심맥락에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가고 해석되는 건 아래층에서 이루어진다. 이 와중에 관계는 역전되고 때때로 상류층은 시종들의 비웃음섞인 시선을 받기도 한다.




조롱당하는 이들 : 독일인과 미국인

250여년에 가까운 시대적인 터울, 두 영화는 하노버 왕조(House of Hanover, 1714~1901)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와도 같은 시대적 배경을 지닌다.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의 배경이 되는 1694년의 왕정복고기는 20년 후 하노버 왕조를 기다리고 있었고, <고스포드 파크>의 배경인 1932년은 15년 후 미국의 마샬 플랜(Marshall Plan)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영화는 영국귀족의 대저택에 초대된 이방인들이 받았던 조롱을 묘사한다.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에서 영국귀족의 사위가 된 독일귀족(휴 프레이저; Hugh Fraser)은 처음부터 끝까지 화가 네빌의 웃음거리가 된다. 사내아이가 없는 귀족집안의 재산을 탐내는 순진한 독일인에게 아내(앤 루이스 램버트; Anne-Louise Lambert)는 완곡한 어조로 그의 무지함을 달래고 비웃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내 영지에서 쫓아버렸을 거야"
"당신의 영지라고요?"

<고스포드 파크>에서 사냥 파티에 초대된 미국인들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떠오르는 제국 미국은 1932년 당시만 해도 여전히 변방이었고, 헐리우드 영화는 영국귀족들이 보기엔 보잘 것 없는 하류문화에 지나지 않았다. 사냥 파티에서 교양있는 영국의 상류층들은 헐리우드에서 날아온 감독(밥 발라반; Bob Balaban)과 배우(제레미 노댐; Jeremy Northam)를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자신들과 구분지으려 하지만, 집주인의 죽음과 함께 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사라져버릴 운명이었다.

"미국인들은 전부 총에 미쳐있다구요"
"맞아요, 새 보단 옆집 사람을 쏴대죠"



질서를 유지하는 이들 : 계약중재인과 집사장

처음부터 끝까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이들.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에서 화가와 귀족부인 간의 계약을 중재하는 Mr. 노이스(닐 커닝햄; Neil Cunningham). 부인과의 묘한 염문을 뿌리며 공공연히 영지의 주인을 싫어한다고 떠들고 다니던 그는 사체가 발견되자마자 자신에게 의심의 눈길이 돌아올 것을 우려해 계약서를 빌미로 귀족부인을 협박한다. 계약서가 유지하던 귀족과 화가간의 불편한 균형은 중재자의 잇속에 의해 여지없이 깨어지고, 계약서의 방패 아래 귀족들을 이용하고 조롱하던 네빌은 귀족들의 분노에 알몸으로 노출된다.

<고스포드 파크>의 집사장 제닝스(앨런 베이츠; Alan Bates)는 귀족과 시종들을 잇는 주요한 다리이다. 그는 살해된 주인 매코들 경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경찰은 저택에서 유일하게 전과기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의심도 해보지만 그는 끝까지 묵묵부답으로 저택의 평온함을 유지한다. 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무대의 참여자들은 저택의 주인에게서 나오는 돈으로 살아가면서도 그를 죽이기를 열망한다. 중간자들은 주인의 죽음이 누구에게도 손해를 끼치지 않는, 모두가 바라던 결과라는 점을 가장 잘 인식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영화계의 풍운아들 : 피터 그리너웨이(Peter Greenaway)와 로버트 알트만(Robert Altman)

아마 비난받은 걸로만 따진다면 이 두 감독을 따라올 사람을 찾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다. 공교롭게도 비난받은 이유도 꽤나 비슷하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영화에서 회화의 전통을 도입하려다 영화인들의 공분을 샀고, 로버트 알트만은 헐리우드에서 유럽영화의 지적인 전통을 세우려다 헐리우드의 뭇매를 맞았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거장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의 스타일을 따라하는 사람 또한 은근히 많다.

일단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은 시종일관 등장하는 회화의 오마쥬 덕분에 영화관이 아니라 미술관에 들어간 느낌을 준다. 원래는 30분이었다는 오프닝크리릿은 짧게 짧게 끊어지는 대화가 곁들인 10분짜리 까라바죠(Caravaggio)의 회화작품이 된다. 영화제목과 참여자의 이름 등은 회화처럼 서명으로 날인되고, 영화는 화면 속의 르네상스 미술을 찾다가 어느새 끝나버린다.

<고스포드 파크>는 이 영화가 미국 영화인지, 아니면 영국 영화인지 무척이나 혼란스럽다. 영국식 악센트가 난무하는 가운데, 이렇다하게 드러나는 주인공도 없고, 스릴러 작품 특유의 긴장감을 유도하기 위한 시도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영화 내내 이어지는 단편적인 대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관계만을 파악하는 데에도 2시간은 빠듯하다.

분명 이 두 영화는 잘 만든 웰메이드 영화나 긴박감 넘치는 스릴러를 기대하는 관객들에게 실망스럽기 그지없을지도 모른다. 느린 호흡과 파편적인 조망, 부산스러운 구성 등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식 혀굴리기 발음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에 지친 사람에게라면 권해볼만 하다. 영국의 역사와 유럽영화, 그리고 미술이나 컬트적인 감성 등에 충실한 두 편의 부조리살인극. 막장의 낯뜨거움과는 다른 부조리극의 맥빠짐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피터 그리너웨이와 로버트 알트만은 충분히 좋은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