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은 해석이다. 해석이 없는 자료는 아무리 많더라도 단순한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지식은 자료로부터 잉태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반대이다. 해석이 먼저이고, 근거로써 자료가 요청된다. 물론 새로운 사실의 발견 등으로 인해 기존의 지식에서 결함을 찾아내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미 해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역사는 비록 사실에 토대를 둔 것이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결코 사실이 아니고 널리 인정되게 된 일련의 판단에 불과하다.”
– E. H. 카 지음, 김승일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 ‘제1장 역사가와 사실’, 범우사, p.25 / G. Barraclough, History in a Changing World(1955), p.14

과거의 기록에 바탕한 지식이라는 점에서 역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역사는 해석이며, 누가 어떠한 판단을 추구하느냐에서부터 자료들이 취사선택되어 해석된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사는 시대에 자신의 위치와 입장에 결부된 판단을 가지기 마련이며, 역사는 그러한 현재의 사람들이 그러한 과거의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판단의 연속으로 존재한다. E. H. 카가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p.53)'라고 말하는 건 바로 이런 의미이겠다.

(…) 1914년이 되기 전에 자유방임주의 사상의 근본을 이루었던 윤리적 명제는 어떠한 사상가에게도 더 이상 매력적이 아니었다.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경제학적으로 이익의 조화란 사상은 구석에 몰린 약자들의 이익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이생의 불균형이 내세에는 고쳐질 것이라고 자위하지 않는 한 유지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E. H. 카 지음, 김태현 옮김, "20년의 위기", '제II부 위기의 세계, 제4장 이익의 조화', 녹문당, p.77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인 동시에,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이기도 하다. 현재의 희망이나 신념으로부터 역사는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자부심을 느끼거나 혹은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대상이 될 수도 없다. 증오와 폭력의 시대를 살았던 E. H. 카는 그 속에서 막연한 생각들이 빚어낸 혼란상에 주목했다. 그냥 그렇다고 여겨져 오는 것들에 대한 의구심. 때로는 고통스럽고 대개는 피곤하기 그지없더라도,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해본다는 것. 적어도 그에게는 자신의 시대가 이러한 합리성의 목소리가 좀처럼 들리지 않았던 시기에 다름 아니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민주국가들이 승리함에 따라 민주주의가 최고의 정부형태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 파시즘의 장점에 대한 생각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사적, 경제적 힘에 비례하여 달라졌다. 이와 같은 예는 무수히 들 수 있다. 생각에 대한 영향력이 군사력, 경제력과 구분될 수 없는 것이라면 힘과 기술만 있으면 어떠한 생각도 마치 진실인 양 만들 수 있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 '제III부 정치, 권력 그리고 도덕, 제8장 국제정치와 권력', p.186

인식의 한계를 망각하거나, 불편한 사실들은 외면한 채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 할 때 역사는 위험해진다. E. H. 카는 일관된 어조로 모든 역사는 해석되는 역사라는 점을 계속해서 일깨워준다. 역사를 알아간다는 건 어쩌면 스스로의 한계와 마주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환상을 경계하라. E. H. 카의 저술은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자, 인간의 지성에 대한 경고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