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가 오늘의 세계를 바라본다면, 그렇더라면 어떠한 생각을 했을지가 궁금해진다. "어제의 세계"는 자서전이면서도 유서이다. 노쇠한 시대를 보냈던 젊은 시절에 대한 향수이고, 또 낯설은 현재에 대한, 약간쯤의 변명이기도 하다.

나는 빈에서 전 도시가 흥분 상태에 있음을 보았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국민도 정부도 원하지 않았던 전쟁. 그것을 사용하여 희롱을 하고 공갈을 해댔던 외교관들의 서투른 손에서 그들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미끄러 떨어져 버린 이 전쟁. 전쟁에 대한 공포는 갑작스런 열광으로 돌변했다. (…)
1914년의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처음 몇 주일 동안에 다른 사람과 이성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점점 불가능하게 되었다. 가장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가장 선량한 사람들도 피 냄새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이때까지 단호한 개인주의자이고 정신적 무정부주의자라고 생각한 친구들이 하룻밤 사이에 광신적인 애국자로 변했고, 또 애국자에서 지칠 줄 모르는 병합주의자로 변해 갔다. 모든 대화는 다음과 같은 어리석은 문구, '미워할 수 없는 자는 진심으로 사랑할 수도 없다'로 끝나든지, 아니면 거친 중상의 말로 끝나는 것이었다. (…) 왜냐하면 '패배주의자'-이 훌륭한 단어는 때마침 프랑스에서 발명되었다-는 조국에 대한 가장 나쁜 배신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곽복록 옮김, "어제의 세계", '09. 1914년 전쟁의 처음 한동안', 지식공작소, p.281-295

오스트리아 빈의 부유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음악과 문학을 찬미했던 그에게 새로운 시대는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었다. 그는 로맹 롤랑과 오귀스트 로댕의 프랑스를 증오할 수 없었다. 괴테와 슈트라우스의 독일도, 크로체의 이탈리아도, 고리키의 러시아도, 블레이크의 영국도, 그리고 릴케와 프로이트의 고향이자 동시에 자신의 고향이었던 오스트리아도, 그는 어느 누구 하나 증오할 수 없었고, 그리고 그로 인해 증오받았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무너지고 옛 제국은 조각조각 나뉘어졌다. 반쯤 폐허가 된 도시에서 그는 어제의 흔적을 찾아헤맨다. 하이퍼인플레이션과 더불어 생활은 하나의 악의적인 농담 같아졌지만, 그럼에도 일상은 지속되었고, 잃어버렸다고만 여겼던 옛 친구들도 하나씩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리석은 증오는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는 그러리라 믿었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일어난 분서나 죄인을 욕보이는 기둥 행사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 지 한 달 무렵에는 멀리 앞을 내다보는 사람들에게도 아직 이해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치는 세계를 마비시키고 무력화하기까지는 그가 목적하는 과격성을 완전히 보이지 않으려고 비양심적인 기만 수법으로 조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신중하게 그들 방법대로 진행해 갔다. 처음에는 한 번 복용에 소량만 사용하고 난 뒤 잠깐 휴지기를 두었다. 한 번에 한 알의 약만 쓰고, 그런 뒤에는 잠깐 기다려 보아 그것이 너무 강하지 않았는지, 세계의 양심은 이 한 모금의 분량을 아직도 잘 소화해 낼 것인지를 지켜보았던 것이다.
- '15. 히틀러, 여기 시작하다', p.465

증오는 사라졌던 게 아니었다. 단지 좌절되었을 뿐이었다. 더욱 어둡고 위험한 폭풍우가 찾아왔다. 말은 힘을 잃었고, 사람들 사이엔 벽이 세워졌다. 그는 이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증오받았다. 애지중지 다시 가꾸어왔던 삶은 송두리채 부정당했고, 집과 고향, 그리고 이내 국적마저 잃어버렸다.

의심스러운 이방인. 고향에서도, 망명지에서도, 그는 마땅치 않은 존재가 되었다. 전쟁이 점차 극단으로 치달았던 1942년, 늙고 지친 슈테판 츠바이크는 결국 '꿈의 성곽'에서 추방당한 현재를 견뎌낼 수 없었다.

인류의 진보를 믿었던 어제는 산산히 부수어졌다. 그리고 슬프게도, 아직 시간은 인간에게 증오로부터 자유롭기를 허락치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