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가 "군주론"을 썼다면? 처음엔 엄청 그럴 듯해 보였는데, 막상 쓰고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암튼 이번 편은 지난 "군주론"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리바이어던"을 읽다보니, 오잉? "한비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한비자"를 뒤적이다 보니, 오잉? "군주론"도 얼추 이런 비슷한 내용이라던 거 같은데?라고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이라 한데 묶어보려고도 해봤으나, 너무 길고 복잡해지기도 할 뿐더러, 통치의 관점을 지닌 "군주론"이나 "한비자"와는 달리, "리바이어던"은 복종의 관점으로 접근하기에 따로 다루는 편이 좋겠다 싶었다. 복종. 얼핏 보기에도 졸라 위험해보인다. 그럼, 채찍이 난무하는 SM의 세계로…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오래되고 답없는 질문이 또 있을까. 이미 살펴보았던 인물들은 물론, 정의의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사상가는 없을 것 같다. 플라톤이나 아담 스미스는 '너님과 나님은 하는 일이 다를 뿐'이라는 사회적 분업으로 정의를 설명하고자 했고, 마르크스는 '씨바, 하는 일이 다를 뿐이라고?'라며 사회적 분업이 현실에서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밝히려 했다. 마키아벨리와 한비와 같은 경우에는 정의란 게 뭐냐는 원론적인 질문보다는 어떻게 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느냐에 보다 관심을 기울였고, 공권력과 법의 공정한 집행에서 각각 그 대답을 찾았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토마스 홉스는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준법시민이라 부를만한 국민으로부터 썰을 풀고자 한다.

정부가 없는 곳에서 행위의 규칙은 자연법이다. 정부가 있는 곳에서는 시민법이 행위의 규칙이다. 즉 시민법이 '정직'과 '부정직', '정의'와 '불의', 그리고 전체적으로 '선'과 '악'을 결정한다. 그러나 그들(도덕철학자)은 자신들의 '호오(好惡)'를 '선악'의 기준으로 삼았다.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로써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각자가 제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따라 행동에 나서면, 코먼웰스(국가)는 붕괴되고 만다.
- 토머스 홉스 지음,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 2", '제46장 공허한 철학과 허구의 전설에서 생기는 어둠에 대하여', 나남, p.387

"리바이어던"을 단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법과 원칙'이 존중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겠다. 토마스 홉스가 생각하는 정의는 간단하다. 법이 곧 정의이다. 왜냐하면 법이 없는 곳에서는 이기는 놈이 정의이고, 따라서 불의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순환논리 같기도 하고, 말이 되는 듯 안 되는 듯 영 아리까리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 유명한 대목부터 일단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은 누구나 자기 친구들이 자기를 높이 평가해주기를 바란다. 최소한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는 정도만큼은 평가해주기를 바란다. 따라서 자기를 경멸하거나 혹은 과소평가하는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자기를 경멸한 사람을 공격하여 평가의 수정을 강요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더욱 높아질 것을 기대한다.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는 원인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경쟁competition이며, 둘째는 자기 확신의 결여diffidence이며, 셋째는 공명심glory이다.
인간은 경쟁 때문에 이익확보를 위한 약탈자가 되고, 자기 확신의 결여 때문에 안전보장을 위한 침략자가 되고, 공명심 때문에 명예수호를 위한 공격자가 되는 것이다. 첫재는 타인과 그들의 처자권속 및 가축들을 지배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방어를 위해 폭력을 동원하는 것이며, 셋째는 한 마리 말, 혹은 단 한 번의 웃음, 혹은 의견의 차이 등, 자신의 신상이나 자신의 친척, 친구, 민족, 직업, 가문에 대해 얕잡아보는 사소한 표현들 때문에 폭력을 동원하는 것이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진다. 즉 인간은 그들 모두를 위압하는 공통의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전쟁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전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다.
- "리바이어던 1", '제13장 인간의 자연상태, 그 복됨과 비참함에 대하여', p.170-171

봉건제와 교황권의 쇠퇴과정은 지난 편에서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이제 외부에서의 간섭도 사라지고 내부의 2인자들도 사라졌으니, 우리 모두 손에 손을 잡고 국왕님 아래 국민통합을 이루어보세~라는 세상이 도래했…을 리가 만무. 왕권이 강화되는만큼 도시의 중간계급도 성장해갔고, 교권이 약화되었다고는 해도 일상의 세계는 여전히 기독교에 의해 지배되었다. 아니 어찌보면, 오히려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교황을 정면으로 깠던 마르틴 루터 이래로 모든 사회적 갈등이 종교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가령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던 네덜란드의 경우에도 명분은 개신교도 탄압이었으며, 교회령을 복속시키고자 했던 지방영주들이라든지, 혹은 세습으로 이어지는 계급에 반감을 가졌던 중간계급에게도 개신교는 명분을 제공해주었다. 비록 14세기의 작품이지만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대강 당시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을 듯 싶다. 교회에 불만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없었지만, 교인이 아닌(정확히는, 아닐 수 있었던) 사람도 없었다.

가톨릭 Vs 개신교. 토마스 홉스가 활동했던 17세기 전반기에는 이러한 편가르기가 절정으로 치달었던 때였다. 대화와 타협은 사라져버렸고, 1618년의 30년 전쟁으로 온 유럽이 (마치 이후의 역사를 예고하듯) 양편으로 갈려 단체패싸움을 벌였다. 특히나 영국의 경우엔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는 청교도들이 튜더 왕조의 후반기 동안 서서히 의회와 대학 등을 장악하며 새로운 왕을 맞아들일 만반의 채비를 갖춰놓고 있었다.

하지만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고 들어선 스튜어트 왕조는 왕권신수설을 기치로 일방통행만을 강요했을 뿐이었다. 카톨릭적 색채가 더욱 강해진 영국 국교회만이 옹호되었고, 의회와의 대립, 청교도 박해도 심해져갔다. 싫은 사람이 떠나는 것(메이플라워 호) 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어보였으나, 스코틀랜드에도 영국 국교회를 강제하려다 일이 걷잡을 수 없게 되버린 주교전쟁Bishops' Wars으로 인해 상황은 반전되었다. 프랑스 혁명도 결국 전쟁비용으로 인한 적자가 주요한 원인이었듯, 이쪽도 결국 돈이 문제였다. 전쟁에는 돈이 필요했고 세금을 걷기 위해선 의회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얼굴을 마주한 왕과 의회에게서 고운 말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노릇. 아니나 다를까 30년 전쟁의 압축판이나 다름없는 1642년의 청교도 혁명(혹은 잉글랜드 내전)으로 왕의 머리가 잘리고, 공화국(이라 쓰고 군사독재라 읽는다; 1649~1660년)의 짧은 역사와 그에 뒤이은 왕정 복고의 험난한 여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리바이어던"을 집필했을 당시 홉스는 청교도 혁명을 피해 파리로 도피해있던 상태였다. 딱히 귀족집안 출신도 아니고 청교도적인 교육을 받았다고는 해도, 왕과 절대군주제를 지지했던 덕분에 수꼴의 대표인물 쯤으로 찍혀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왕이 무조건 옳다거나, 혹은 절대군주제가 졸라 훌륭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홉스는 사회의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국가가 없는 상태를 자연상태로 규정한다.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무정부상태 쯤으로 이해하셔도 큰 무리는 없겠다. 암튼, 자연상태에서는 폭력이나 기만 외에는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설령 내가 폭력이나 기만을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이들의 생각은 어떤지 확신할 수 없기에 불안과 공포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자연상태는 곧 평화의 부재와 같은 의미이며, 언제든지 싸움이 벌어질 수 있는 전쟁상태이기도 하다.

가혹한 상황에서 인간은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는데, 여기에서 규칙이나 법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나님이 어떠한 권리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해당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일정한 권리의 포기 내지는 양도를 요구하는데, 이러한 계약으로부터 '리바이어던(국가)'이라는 괴물이 탄생하게 된다. 구성원들에게 일정한 권리를 양도받은 국가의 대표자에게는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법을 만들고 판결하고 집행하는 주권자로서의 역할이 주어지며, 국민은 국가의 법과 주권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헥헥, 대략 이 정도가 <리바이어던>의 기본골자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국가도 필요하고 통치자도 필요하지만, 권력은 신이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 되겠다. 인간의 세계에서 권력은 어디까지나 합의에 의한 것일 뿐이다. 즉 마키아벨리와 한비가 권위에 걸맞는 능력을 요구했다면, 홉스는 여기에서 '너님이 잘나면 얼마나 잘났겠음, 국민이 복종하지 않는 권력은 애당초 존재할 수가 없는 거임'이라며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복종은 복종하는 자의 의사에 따른 것이지, 권력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인간이 육체적·정신적 능력의 측면에서 평등하도록 창조했다. 간혹 육체적 능력이 남보다 더 강한 사람도 있고, 정신적 능력이 남보다 뛰어난 경우도 있지만, 양쪽을 모두 합하여 평가한다면, 인간들 사이에 능력 차이는 거의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이익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 크지는 않다. 왜냐하면 세력이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음모를 꾸미거나, 혹은 같은 처지에 있는 약자들끼리 공모하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제13장 인간의 자연상태, 그 복됨과 비참함에 대하여', p.168

귀족 합의체나 민주적 합의체에 의해 통치되는 인민의 번영은 귀족정이나 민주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복종과 화합에서 오는 것이며, 군주정 하의 인민이 번영을 누리는 것은, 한 사람이 통치의 권리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국가의 종류가 어떠하든, 복종이 사라지면, 그리고 그 결과 인민의 화합이 사라지면, 그들은 번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단시일 내에 해체되고 말 것이다.
- '제30장 주권을 지닌 대표자의 직무에 대하여', p.434-435

가장 흔히 범죄의 원인이 되는 정념 중의 하나는 허영vainglory, 즉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과대평가이다. 이것은 가치의 차이는 지력이나 재산이나 혈통, 기타 선천적인 자질의 결과이지 주권자의 의지에 달린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허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품는다. 즉 법에 규정된 처벌은 모든 백성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일반대중', 즉 가난하고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과 똑같은 기준으로 자기들에게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제27장 범죄, 면죄 및 정상참작에 대하여', p.385

재밌는 건, 이런 주장 때문에 홉스는 국왕 측에게도 '쟤 우리 편 맞나?'라며 의심받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리바이어던>에서는 총 4부의 구성 중 절반에 해당하는 3부와 4부에서는 지루할만큼 성경의 교리를 집중분석하며 '자꾸 신앙이나 도덕을 내세우니까 말이 안 통하는 거임. 그렁 거는 혼자 간직하시고, 자꾸 인간의 일에 상관도 없는 하나님을 끼워넣지 마시라능'이라며 교회까지 대차게 깐다. 교황청과의 악연으로 기억되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바로 이 시기의 인물(실제로 홉스와 만난 적도 있었다)이었다. 당연히 원래부터 찍혀있었던 청교도 측의 비난은 물론, 영국 국교회+가톨릭으로 뭉쳐진 왕당파에게는 더욱 심하게 뭇매를 맞았고, 프랑스로 도망칠 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이단심판을 피하기 위해 혹시하는 심정으로 영국의 청교도들에게 SOS를 날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여담으로 왕정복고 이후 홉스는 "베헤모스Behemoth"라는 책을 쓰는데, 이미 성서의 수컷괴물(리바이어던)의 뜨거운 맛을 보신 국왕님께서 암컷괴물에게까지 당하실 수는 없다며 인가를 안 내준 까닭으로 한동안 해적판으로만 돌았다고 한다. 한글로도 골치가 아픈데 번역본이 없는 터라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청교도 혁명을 비판하는 내용이라는 데도 그랬다더라. 영문 원판은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역시나 능력자분들이라면 한 번 도전해볼만 하겠다.

(또한) 그리스도의 대행자들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갖도록 하는 것인데, 신앙은 강제나 명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강제한다고 해서, 명령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이성으로 판단한, 혹은 자신의 기존의 믿음으로 판단한 증거의 확실성 또는 개연성에 의해 좌우될 뿐이다.
- "리바이어던 2", '제42장 교권에 대하여', p.182

사람들에게 행복의 길을 가르쳐 주겠다는 것은 그 사람들을 통치하겠다는 것이다.
- '제36장 하느님의 말씀과 예언자에 대하여', p.99

자연과학을 억압하고, 자연적 이성의 도덕을 억압한다고 해서 권력이 유지되지는 않는다. 또한 모호한 언어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현학을 과시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요, 경건을 가장한 사기도 될 일도 아니다. 오늘날 하느님 교회의 목사들이 저지르는 잘못들은 그 자체로 과오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비틀거리게 하는 비행이다. 권위로 억압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 '제47장 이러한 어둠에서 생기는 이익과 수익자에 대하여', p.418

다시 돌아와서, 홉스는 어떤 사회에서든 목소리 큰 넘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라 생각했고, 이를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지에 관심을 가졌다. 그에겐 자신의 시대가 곧 자연상태나 다름없었다. 신의 이름은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는 커녕, 오히려 부채질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회적 갈등이 나는 선과 너는 악의 대결양상으로 진행되다보니, 타협의 여지가 사라져버리고 대신 폭력과 기만이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선과 악의 구분법은 물론, 도덕적인 옳고 그름이라던지, 혹은 개인의 좋고 싫음에도 협상의 여지가 없기는 마찬가지. 그래서 홉스는 국가에 주목한다. 칼과 권장을 든 조정자, 국민의 합의에 의해 탄생했기에 국가는 하나의 거대한 집합적 인격이자, 법이라는 수단을 통해 구성원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안전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설명된다.

그럼 당연히 국민이 복종할만한 법이 무엇인지를 따져볼 수밖에 없겠다. 홉스는 법이 지고선이나 진리를 담보한다고 생각치는 않았다. 에덴처럼 낙관적인 명칭 대신 굳이 괴물의 이름에서 제목을 따온 이유이기도 하다. 국가는 투명드래곤, 아니 괴물이다. 법이란 것도 단지 규칙에 지나지 않으며, 끊임없이 수정되고 고쳐지기도 해야 한다. 게다가 국가가 마구잡이로 법을 만들어내거나, 제멋대로 법을 해석하고 집행한다든지, 혹은 특정한 이해관계만을 옹호하며 공정함을 잃을 수도 있겠다. 절대존엄과 종교대립의 시대를 살았던 홉스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자연상태에서 도출된 최초의 원칙을 사회계약의 근거로 계속해서 강조한다.


제1의 자연법: '모든 사람은, 달성될 가망이 있는 한, 평화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평화를 달성하는 일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어떤 수단이라도 사용해도 좋다.' 평화를 추구하되, 자신의 생명권과 그 수단을 확보하는 권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제2의 자연법: '인간은 평화와, 그리고 자기방어가 보장되는 한, 또한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그렇게 할 경우, 만물에 대한 이러한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자신이 타인에게 허락한 만큼의 자유를 타인에 대해 갖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조금 말이 어렵지만,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로 설명된다.


이외에도 법의 원칙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많지만 현 시대와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고, 어떠한 법도 위의 두 가지 원칙에 위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하겠다. 가령 <레 미제라블>의 장 발장처럼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쳤다면 무죄가 된다. 혹은 정당방위처럼 누가 나를 해치려 했을 때 자신의 생명을 방어한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생존권이란 그 수단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며, 어떠한 법이나 도덕보다도 앞서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법이 공표되었다고 하더라도, 구성원들이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경우에도 법은 무효가 된다. 국가는 사용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구성원들에게 알려주어야만 할 의무가 있으며, '법에 대한 무지' 상태에서는 오로지 자연법만이 적용가능하다. 형벌은 계도의 목적으로만 수행되어야 하며,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형벌, 즉 상을 내려주지 않는다든지, 공적인 심리를 거치지 않는다든지, 너무 가볍거나 너무 무겁거나, 단지 괴롭히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상이나 적대행위로 봐야한다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

(그러나) 그들(일부 지식인)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설령 그 원칙들이 옳다고 할지라도, 일반대중은 그것을 이해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바라건대, 어느 왕국에서든 부유하고 유력한 백성들이, 혹은 가장 박식하다는 사람들이 일반대중만큼 만이라도 똑똑했으면 좋겠다. 이러한 종류의 학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배우는 자의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유력한 사람들은 그들의 정념을 억제하려는 권력이 수립되는 것은 무엇이든 참아내지 못하고, 박식한 사람들은 그들의 오류가 드러나는 것은, 그로 인해 그들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은 무엇이든 참아내지 못한다. 반면에 일반대중의 정신은, 유력한 사람들에 대한 의존으로 인해 오염되지 않는 한, 박사들이 자기들의 의견을 낙서해 놓지 않는 한, 백지(clean paper)와 같아서, 공적 권위가 가르치는 바는 무엇이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 그러므로 주권의 본질적인 권리들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주권자)의 의무이다. 의무일 뿐만 아니라, 그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기도 하며, 반란으로 인해 그의 자연적 인격에 가해질 수도 있는 위험에 대한 안전보장이기도 하다.
- '제30장 주권을 지닌 대표자의 직무에 대하여', p.433-434

백성들의 불평등은 주권자의 법령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주권자 앞에서는, 즉 법정에서는 백성들 간에 불평등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왕 중의 왕[즉 하느님] 앞에서는 [코먼웰스의] 왕과 백성 간에 불평등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상층민의 명예는 그들이 하층민에게 어느 정도의 은혜와 원조를 베푸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 것이 없다면, 어떠한 명예도 없다. 폭력, 직권남용, 기타 침해행위를 상층민이 한 경우, 죄가 경감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중된다. 그런 죄를 저질러야 할 필요가 훨씬 적기 때문이다. 상층민을 편들면 다음과 같은 같은 결과가 발생한다. 방면(放免)은 [상층민의] 오만을 낳고, 오만은 [하층민의] 증오를 낳고, 증오는 억압적이고 오만불손한 모든 상층민을 타도하려는 시도를 낳는다. 이것이 마침내 코먼웰스의 파멸을 초래한다.
- p.442-443

비판은 여러 가지가 있겠다. 인종주의, 국가주의 등 그의 선임자(마키아벨리)나 후임자들(루소 등)에게 가해지는 비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고, 근대적 민주주의와 법의 기초적인 논리를 거의 구축하다시피 했으면서도 절대왕정의 옹호자로 끝까지 남으려 했다는 것도 논란이 되는 부분. 그렇지만 흔히 알려진 대로 국가의 대표자에게 모든 권리를 위임해야 한다거나 혹은 절대적인 복종만이 능사라고 하지는 않았다.

앞서의 두 가지 자연법 원칙에 어긋나는 명령이나 법은 무효!, 복종이라는 행위에는 의무뿐만 아니라 자유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게 홉스의 생각이었다. 자신이나 타인을 살해하라는 명령이나, 자신의 생존과 평화를 보장해주지 못할 때에는 복종할 이유가 없으며, 심지어 자발적으로 군대에 복무하는 게 아니라 징집된 경우라면 교전을 거부해도 정당하다고 이야기한다. 법에 규정되지 않은 모든 행위는 자유이고, 법에만 복종하라는 말은 달리 말하자면 법 이외에는 어떠한 것에도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놓치고 지나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고 규정한 적도 없다. 단지 인간은 정념, 즉 여러 가지 욕구와 욕망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자기 능력의 과신 혹은 인정받으려는 욕망에서 상호간의 불신이 비롯된다고 설명할 뿐이다.

결론은 홉스의 생각처럼 법이 곧 정의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라는(혹은 그런 척 해왔다는) 점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법은 일상에 적용되는 규칙이며, 행위의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의 내용을 알기 어렵다면 설령 제아무리 준법시민이라고 해도 법을 지킬 수가 없다. 홉스에게 법이란 지켜지기 전에 먼저 알려져야 하는 것이다. 자연법에 어긋나지는 않는지 또한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도 평가받아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법은 아무런 정당성을 얻을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