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삶을 갈구하는 사람들은 그들 앞에 그 먼 목표에 이르는 세 가지 길을 보아왔다. 그 첫 번째 길은 현재의 세상을 외면하는 부정의 길이다. … 이 길은 모든 고급 문화가 추구해 온 길이다. 그것(저승의 복락에 도달)이 개인적 삶의 목표일 뿐만 아니라 문화의 바탕이라고 강조했다. 얼마나 강조했던지 사람들은 더 나은 삶으로 가는 두 번째 길을 오랫동안 봉쇄당해 왔다.
두 번째 길은 이 세상을 개선하여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중세는 이 길을 거의 알지 못했다. … 이 세상을 좋고 더 행복한 곳으로 만들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결핍, 이것처럼 미래에 대한 공포와 비관론의 전반적 분위기를 부추긴 것은 또 다시 없다. 이 세상은 앞으로 올 좋은 것들의 약속 사항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더 좋은 것을 갈망하지만 이 세상과 화려함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절망뿐이었다. …
세 번째 길은 꿈의 땅을 통과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편안한 길이지만, 목표는 여전히 저만치 떨어져 있는 길이다. 세상의 현실은 형편없을 정도로 비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부정하기도 어렵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제3의 방법은 삶을 화려한 색깔로 채색하고 빛나는 환상의 꿈나라에 살면서, 이데아(이상)의 황홀 속에서 현실의 가혹함을 망각하는 것이다. …
-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중세의 가을", '제2장 더 아름다운 삶에 대한 갈망', 연암서가, p.90-92


미숙한 역사. 요한 하위징아에게 역사는 미숙함의 과정이다. 놀이는 진지해졌고, 진지함은 놀이가 되었다. 줄리언 반스의 외침처럼, 문명은 진지해야 할 때 진지하지 못하고, 놀이와 진지함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사회, "호모 루덴스"는 이러한 문명(화)의 단면을 그려나간다. 놀이는 의미부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자체의 즐거움, 오로지 놀이를 위해서 놀이를 하는 것이다. 놀이에서의 승리는 그것이 얼마나 유의미한 행위인지로 판단되지 않는다. 경쟁은 놀이 과정에서의 즐거움의 하나이고, 승자는 단지 승자이기 때문에 영광을 얻는다.

문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어떤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놀이일 것이며, 진정한 문명은 항상 페어플레이를 요구할 것이다. 페어플레이란 놀이의 용어들로 표현된 훌륭한 믿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속임수나 놀이를 망치는 훼방은 분명히 문명 자체를 파괴한다.
- 요한 하위징아 지음, 김윤수 옮김, "호모 루덴스", '12. 현대 문명에서의 놀이 요소', 까치, p.314

어쩌면 놀이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맞수의 존재이다. (협력자이든, 경쟁자이든, 혹은 갈채를 보내는 구경꾼이든) 상대가 있기에, 놀이는 사회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놀이가 수행되기 위해선 상대를 놀이 참여자로 받아들이는 자세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규칙을 준수해야만 한다. 상대가 없이는 놀이의 즐거움과 승리의 영광을 얻을 수 없다.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 놀이는 더 이상 진정한 놀이가 아니라, 단순히 놀이로 위장한 것일 뿐이다. 놀이의 본질은 상대의 파멸이 아니라 존속을 필요로 한다.

프로페셔널의 정신은 이제 진정한 놀이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움과 내키는 대로 하는 태평스러움을 상실하고 있다.
- '12. 현대 문명에서의 놀이 요소', p.295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중요한 문제지만, 이기기 위해 놀이를 하는 것은 아니다. 승리는 놀이의 결과일 뿐, 목적은 될 수 없다. 승리가 목적이 될 때 놀이는 진지해진다. 승리의 결과를 중요하게 여길수록 본래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리고, "놀아지는 것은 정지"된다. 놀이 정신이 상실된 놀이, 요한 하위징아는 진지함을 가장한 놀이로부터 문명의 미숙함을 발견한다.

벨 에포크. 아름다웠던 시절, 좋았던 한 때에 대한 추억. 전화기와 자동차가 발명되었고, 전등은 도시의 어둠을 밝혀주었다. 세계를 향한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었고, 미래라는 단어는 곧 풍요를 약속해주었다.

하지만. 정말 그러했을까. 요한 하위징아에게 당면한 '미래'는 악몽과도 같았다. 앞만 보며 달렸던 문명을 돌이켜보며 그는, 혹여 쇠락의 징후를 발견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림이나 판화는 항상 실물보다 아름다운 법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흔히 지저분한 내면, 시대의 역겨운 측면을 무시해 버리기 때문이다.
- '11. 놀이의 이종으로서의 서구 문명', p.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