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쥐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는 왜냐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아무 이유 없이 잉크병이 깨지고, 크리스마스 전날밤 3년 전에 헤어진 옛 애인이 갑작스레 들이닥쳐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는 살해당하는 데에도, 그런 일들이 도대체 왜 일어나는지 그는 끝끝내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십계"는 아무런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단편들이다. 그저 길을 가다가 보게 되는 일상의 광경들처럼 이유는 모르지만, 늘상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그러한 이야기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당혹스러워진다. 마치 부조리극을 볼 때마다 느끼게 되는 그러한 당혹감이다. 그는 삶을 이해하려고 들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죽음 역시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왜 사는가, 왜 죽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도 있을 수가 없다. 삶에서 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지 묻는 것 역시 누구도 대답할 수가 없다.

즈비그니에프 프라이즈너의 음악이 흐를 때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되묻는 것만 같다. 당신은 음악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음악이 왜 존재하는지 아무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찌되었든 음악은 존재하고 또한 감동을 주지 않는가라고.

키에슬로브스키는 이 10편의 단편을 통해 인간이 존재한다는 그 단순한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내 가족이, 내 이웃이, 저 혹은 그 사람이 왜 존재하고 있는가를 묻는다는 건 허무한 질문에 불과하다.

인간은 아름답지 않을 수도, 선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삶 속에서 십계명을 온전하게 지키는 사람은 어쩌면 단 한 명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악, 아름다움과 추함을 떠나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십계"는 그러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용서라는 걸 보여주려고 했던 아닐까 감히 추측해본다.

당신의 이웃을 용서하라, 미워하면서 용서하라, 그는 당신의 미움과는 상관없이 존재하고, 인간이 서로를, 그리고 삶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저 외로워져 갈 뿐이다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