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여행자는 처음 찾아가는 나라에서 경험한 것에 관하여, 자신이 기대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는 감상을 말하게 된다. 그것은 곧 책에 쓰인 내용과 자신의 경험이 달랐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여행기나 안내서를 쓴 저자들은, 이 나라는 정말로 이렇다든가, 또는 이 나라는 정말로 경치가 좋다거나, 비용이 많이 든다거나 재미있다고 말한다. … 어떤 경우에든 그 근본에 있는 것은, 인간과 장소 및 경험이 한 권의 책에 의해 언제나 묘사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며, 그 결과 책(텍스트)이 그 속에 묘사된 현실보다도 더욱 큰 권위를 얻어 더욱 널리 이용된다.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텍스트가 단지 지식만이 아니라, 그 텍스트가 서술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 현실 자체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이다.
- 에드워드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오리엔탈리즘", '제1부 오리엔탈리즘의 범위 - 제4장 위기', 교보문고, p. 172-174


가끔씩 '정말 어렵다' 내지는 '이 내용을 내가 정말 이해하고 있는걸까'라며 보는 내내 의심스러워 하면서도 읽고 나면 무언가가 달라진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나 작품들이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도 이러한 느낌을 주는 책 중의 하나이다. 저서 내에서 언급되는 풍부한 자료와 치밀한 분석에 대한 이해는 조금쯤은 미뤄둬도 좋을 것만 같다. 부족한 배경지식에 헐떡이며 간신히 다 읽었구나라고 내려놓기가 무섭게, 평소에 사용하는 언어와 그 언어의 바탕 아래 깔린 생각들에 대한 고민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조심스러워진다. 내가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 속에 미처 의심해보지 못한 전제가 깔려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오리엔탈리즘"은 나의 논리, 나의 정합성, 나의 합리성을 위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에선 번역자의 존재감이 유례없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옮긴이의 후기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진진했던 백미와도 같았다. 아무래도 본문이 중동문화권을 바라보는 서구사회의 시각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기에 서구문화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고 폭넓게는 중동문화에 대한 이해도 다소 필요하다면, 번역후기는 한국사회에 이 책이 던지는 의미를 고찰하는, 아무래도 좀 더 피부로 와닿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를 미화하는 한국사회와 미국출신 박사들로 가득한 한국의 학계에 대한 거침없는 성토에선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경하고 신랄한 어조로 인해 일말의 쾌감마저 느낄 수 있다.

번역은 학문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 같은 책, '옮기면서', p. 683

권위에 대한 의심, 일상언어 속의 권력은 에드워드 사이드로 인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번역의 필요성, 번역자의 중요성은 옮긴이 박홍규 덕분에 생각해보게 된다. 한국어로 번역된 "오리엔탈리즘"을 읽는다는 건 어찌보면 대단히 운이 좋은 일이다. 원문 이상을 담기 위해 노력하는 번역서는 매우 드문 경우 중의 하나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