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의 불안 속에 표현되는 갈등은 어떤 개인이 사회의 지배적 견해에 대해 가지는 갈등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행동을 통해 이러한 사회적 의견을 대변하는 자신의 자아부분에 대해 갖게 되는 갈등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 자신의 심리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갈등인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인정한다. 그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의 사랑 및 존중의 상실을 두려워한다. 이 타인들의 태도는 그의 내면 안에서 일종의 태도로 굳어져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자동적으로 이 태도를 취한다.
- "문명화과정 II", '제3장 문명화이론의 초안 - 제6절 수치심과 당혹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한길사, 1999, p. 383


그냥 어느 순간 갑자기 생각나는 작품들이 있다. 매주를 기다리며 봤었고 종영에 아쉬워도 했지만, 정작 이 미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하우스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 "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 Everybody lies."가 뇌리에 떠올라 사라지지를 않았다.

저 단순한 말이 얼마나 현대문명사회를 관통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은 왜 거짓말을 하는가, 우선 거짓말이 있기 위해선 자신과 타인이 단절되는 비밀스러운 공간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스스로가 타인의 눈에 좋은 사람으로써 인식되어야 한다 내지는, 최소한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다라고 평가되어야만 한다라는 기제가 있어야만 한다. 거짓말은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긍정적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거짓말은 말해지는 바로 그 순간부터 자신의 진실된 모습, 욕망들을 억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지적하듯 이 순간부터 타인의 시선은 더 이상 외부에 있지 않다. 그것은 곧 내재화되어, 스스로가 지닌 말 못하는 비밀들을 하나의 수치심으로 바꾸어버린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본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하우스"의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러한 거짓말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려 병원에 실려오는 환자는 물론이고, 하우스의 사무실에서 함께 근무하는 팀원끼리도 매일같이 서로에게 거짓말을 한다. 모든 에피소드는 하우스가 어떠한 수고도 아끼지 않으며 굳이 그들의 비밀을 밝혀내며 끝나게 된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거짓말이 밝혀졌을 때, 의외로 타인의 시선은 담담할 뿐더러,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을 나쁘게 평가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거짓말이 들킨 사람은 수치심보다는 오히려 해방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듯이 보인다.

8년이 넘는 방영기간동안 사실상 "하우스"가 말해온 것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말자,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바라는 것들을 조금만 더 존중해주자가 전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또한 현대사회 안에서 개인들이 얼마나 자기통제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하우스라는 주인공의 이름은 정말 탁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듯 싶다. 집 안에서의 모습과 집 밖에서의 모습, 이 둘 간의 화해되지 않는 거리감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더 멋지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노력들은 매우 좋은 일이겠지만, 때로 그것이 너무 심해지면 스스로를 끊임없이 압박하는 강박만이 남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