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2019년의 장시작일, 1월 2일에 삼성전자의 주가는 38,750원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다면 질문. 2018년 1월 2일의 삼성전자의 주가가 반드시 38750원으로 마무리되어야만 했던 명확하고도 분명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장종료가 3분만, 아니 3분은 너무 길다. 3초만 더 늦었더라도 과연 같은 결과였을까? 갑작스러운 악재 혹은 호재가 터졌더라면, 훨씬 더 사소한 가정으로 어떤 한 사람이 추운 날씨에 하려던 외출을 포기하고 집 안에서 쉬다 불현듯 주식투자를 한 번 해볼까하는 마음이 들었더라면, 그렇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가정이란 무의미하다는 말처럼, 누구도 이런 있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러나 시간 속에 박제되어 너무나도 분명해보이는 사실들은, 어쩌면 단지 이미 그렇게 정해졌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닐까? 2018년 1월 2일의 장종료가 2,551,000원 언저리에서 삼성전자의 주식을 구매했던 투자자들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50 대 1로 액면분할되어 이듬해 같은 날에는 그 가치가 대략 20%정도 떨어지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투자자들은 불만을 품고 누군가를 비난할 수도 있다. 증권사의 애널리스트나 투자전문가, 아니면 특정 정치인에게 화를 낼 수도 있고, 그냥 막연히 세상에 대해 원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수라도 있다면 다행이다. 이 정도는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말하는 검은 백조의 축에도 끼지도 못하는 일상적인 사건일 뿐이니까. 사정은 얼마든지 더 나빠질 수 있었다. 그게 아무리 희박한 확률일지라도.

우리가 쉽사리 깨닫지 못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우리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김현구 옮김, "블랙스완", '프롤로그', 동녘사이언스, p.29

그동안 조금씩 수학과 경제학에 익숙해지며 막면하게나마 한 가지 느끼는 점이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수학에 관심을 갖고 회귀분석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가 기억난다. 나는 이런 식으로 숫자들을 다룰 수 있다는 데에 놀랐고, 마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마법의 도구로 여기며 어떻게든 그 방법을 배우고자 했다. 교과서 속의 사례들은 너무나도 분명한 '증거'들이었고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멋진 도구를 교과서 밖의 사례들에 적용했을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바로 '내가 뭘 잘못한거지?'였다. 수학적·통계적 추론법이 딱 들어맞기는 커녕, 아주 약간만이라도 적용가능한 경우를 찾기 쉽지 않았고, 교과서 내의 사례들이 오히려 예외들이었던 것이다. 아마 경제학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느껴봤을 듯 싶다. IS-LM 모델, 포트폴리오 이론, 블랙-숄츠 모델 등 그 수많은 모델들을 현실에 실제로 적용해보려 했을 때의 막막함을. 나는 먼저 예측해야만 했다. 다른 이유도 아닌, 바로 예측하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눈에 분명히 보이는 결과를 염두에 두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 혹은 덜 고려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더 의미심장할 수 있다.
- '8장 자코모 카사노바의 기막힌 행운: 말 없는 증거의 문제', p.201

잘못된 지침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낫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탈레브만큼 회의적이지는 않다. 틀렸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실제적 효용이 없다 하더라도 여러 생각들을 해볼 수는 있고, 그러한 노력 자체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보다 예측가능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잘못이라 할 수 없다. 인류의 문명에서 그나마 쓸만한 것들은 어떻게든 세계를 이해보려던 그런 사람들의 어리석은 희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화나 규모를 곧 안정성으로 사고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도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그 정반대의 논리, 즉 작은 규모가 더 안정적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국가나 대기업과 같은 대규모 결사체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물론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그 반대 경우라고 해서 반드시 참인가? 이러한 사고방식 역시 교조주의적이지는 않은가?

탈레브는 '플라톤주의'에 대해 집중적으로 비판하는데, 바로 그 플라톤이 "법률"의 주요논지로 제시하는 바 중의 하나가 바로 결사체의 규모제한이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탈레브가 매우 공을 들여 논박하는 '정규분포곡선'식의 사고에 그 스스로가 물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위험'을 순수하게 물질적 자원의 활용이라는 일상 차원으로만 접근하면 어쩌면 이 주장이 옳을지도 모른다. 기후에 변화가 없어서 지역별 농수산물의 생산량이 대체로 일정하고, 사람들은 단기적 이익에 눈이 멀어 자원을 고갈시킨다거나 매점매석을 한다거나 하지 않으며, 또한 동시에 세상의 변화에도 무관심하여 어제 해왔던대로 늘 자기자리를 지키려 하고 또한 지킬 수 있다는 가정을 만족시킬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사회는 순수하지도 않을 뿐더러 끊임없이 변한다. "블랙스완"의 첫 장부터 논의되는 대로 말이다. 세계화의 사상적 근거는 경제적 차원에 앞서 정치적 차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즉 나와 나를 둘러싼 친숙한 세계에 속한 사람들만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시초였던 것이다. 인류는 이질성, 특히 자기와 매우 유사한 이질성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역사를 쌓아왔다. 사회·경제 체계가 급속한 변화를 겪는 시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원인'은 뉴스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하고 더 손에 잡힐 듯 느껴지게 한다. 선거에서 패배한 후보의 눈앞에는 유권자의 불만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던 갖가지 '원인'이 등장한다. 어떤 이유도 그럴듯해 보인다. 다만 언론은 즐비한 '사실 검증 부대'를 내세워 자신들의 분석을 '그럴듯해' 보이게 할 뿐이다. 마치 지겨울 정도로 정밀하고 세세한 분석을 끝없이 진행함으로써 오류에 묻히기를 원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 '6장 이야기 짓기의 오류', p.148

문제는 믿음을 진리로 착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것에 대해 그것이 자기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쉽게 망각해버린다. 처음의 주식의 예를 생각해보자. 사회 내에서 어떤 것의 가치는 단지 그 가치평가체계를 받아들이는 시장참여자들에 의해 정해질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주가를 마치 자신들과는 무관한 객관적 현실로 착각하고는 한다. 모든 기록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기록되지 않는 과거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현실이 되며, 그러므로 나는 기록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단지 과거의 그림자, 그것도 여기저기 얼룩지고 희미하게 주변이 번진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판단과 행위, 그리고 그에 따르는 결과에 대한 책임은 너무나도 복잡해지고 그래서 서로에 대해 점점 더 이해하기가 어려워지는 현대사회를 옭매는 가장 큰 족쇄와도 같다. 삶의 조건과 이해관계, 선호의 다변화는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물론, 기본적인 의사소통의 간격마저 넓히고 있다. 모든 개인은 각자의 관심사에 있어서 저마다의 전문화 경향을 보이며, 그만큼 의사결정에서 개인의 책임성은 나날이 증대해간다. 바로 이로 인해 책임의 균열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너무 잘 아는 동시에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버린 것이다. 의사가 아닌 나는 의사의 일에 대해 사실상 전혀 알지 못한다. 심지어는 의사들도 자신의 전문분야를 벗어나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다지 나을 바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의 치료에 대한 의사결정은 누가 내려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 결정에 따르는 책임은 누가 져야만 하는가?

탈레브는 전문가 행세를 하는 가짜 전문가들에 대해 거의 분노에 가까운 반응을 보여주지만, 사실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굳이 말하자면 누구도 전지전능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고,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누군가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책임이 믿음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는 지식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지적만큼은 곱씹어볼만 하다. 좀 덜 믿어야 하고 좀 더 고민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누구도 진실의 바닷가 모래밭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의 신세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의심하지 않는 이에겐 믿을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