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인식은 언어로 이루어진다. 동시에 인간은 자신이 바라는 바대로 언어를 창조해낸다. 언어의 사용은 모두에게 자유롭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자기 뜻대로 언어를 창조해낼 권리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언어는 언제나 이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채로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언어로 사유한다.

우리가 아는 한, 인간이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오직 언어를 통해서이며, 제아무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도 언어학은 결코 언어 '이전의' 어떤 시작점을 짚어내는 데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 조르조 아감벤 지음, 조효원 옮김, "유아기와 역사", '유아기와 역사: 경험의 파괴에 대한 시론', p.95

대체로 한 명의 개인으로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셋 중의 하나이다. 몇몇은 언어창조자의 일원이 된다. 대개는 그들 사이의 조그만 틈으로 삐져나오는 빛이 몸을 녹여주리라 기대하며 영원히 그 곁에서 서성여야만 한다. 아니면 이미 존재하는 언어에서 그 '누군가'의 흔적을 눈치채고 뒤를 쫓을 수도 있는데, 물론 이는 쉽지 않다.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의심하는 자는 '광인'이 된다. 그는 "시대의 빛이 아니라 어둠을 인식하기 위해, 그곳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존재(조르조 아감벤,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 '벌거벗음', 김영훈 옮김, 인간사랑, p.23)"이며, 따라서 그는 불신하는 존재이자, 그로 인해 불신당하는 존재이다.

인민은 자신이 전체의 일부임에도 그러한 전체 속에 포함되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자신이 집합에 항상 이미 속해 있음에도 그러한 집합에 속할 수 없는 것이다.
-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호모 사케르", '수용소, 근대성의 '노모스'', 새물결, p.335

그렇지만 그에 겁먹을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면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든 광인으로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유 따윈 아무래도 좋다. 인간은 단지 다른 이들이 미쳤다고 말한다는 이유로 얼마든지, 그를, 그녀를, 너를, 스스로를 미쳤다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다. 언어는 그 속이 텅 비어있는 권력이다. 말의 효력이 그 비어있음에 빛을 부여하고, 의미를 낳고, 권위를 낳는다. 따라서 말의 의미는 중요치 않다. 그렇게 말해진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이처럼 말해도 좋다면 신들 또한 시에 의해 만들어지고/아무리 위대한 자의 위엄이라도 이를 찬양할 시인의 입을 필요로 한다(오비디우스, "흑해로부터의 편지", 4권, 8, 55-56, p.455)."
-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정문영 옮김, "왕국과 영광", '8. 영광의 고고학', 새물결, p.419

세속화는 또 하나의 신화에 다름아니다. 합리성은 신을 죽이지 못했으며 다만 대체했을 따름이다. 인간은 여전히 스스로가 만들어낸 질서를 숭배하며, 심지어는 절대화한다. 그렇지만 질서 그 자체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텅 빈 공간을 채워넣기 위해선 우선 그 공간이 텅 비어있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과 인간이 마주하고, 말이 의미를 갖기 위해선, 내가 지금 살아가는 이 순간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해 좀 더 고민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우슈비츠는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품위가 아닌 것이 되는 장소, 자신의 존엄과 자존을 잃지 않고 있었다고 스스로 믿었던 사람들이 그러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경험하는 장소인 것이다.
- 조르조 아감벤 지음, 정문영 옮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이슬람교도', 새물결, p.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