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불연속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시간을 기록해 놓은 역사는 불연속적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는 게 좋겠다. 단지 기록이 그렇다는 것이다. 역사 자체는 단지 지나간 시간일 뿐이며, 따라서 시간이 뚝뚝 끊어진 채로 흐르지 않는 바에야 역사 역시 뚝뚝 끊어진 채로 존재할 리 없다. "대서양의 두 제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너무나도 당연해보이는 사실을 의식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일깨워준다.

콜럼버스와 제퍼슨 사이의 시간. 대개의 세계사적 시계에서 그 사이의 아메리카는 마치 텅 비어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메리카는 '어느 순간' 발견되어, '어느 순간' 갑자기 독립을 주장하고는, 다음 순간 국제사회의 열강으로써 등장한다. 최초의 정복자가 수십만, 수백만명의 시민이 되는 지난한 시간에 대해 듣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나 정복자에게조차 정복이 삶의 모든 것일 수 없었고, 곧 정주민으로 정착하고 이후를 준비하기 위한 노력에 매진해야 했다.

최초의 약탈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사람들이 모이니 도시가 생겨나고 그들만의 문화도 생겨났다. 성장해가는 도시가 요구하는 물품과 자원의 숫자도 증가해갔고, 그에 따라 내외부의 거래망 뿐만 아니라 행정 체계도 점차 정교해졌다. 새로운 이주민은 이미 자리잡은 도시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기가 어려웠으며, 더 많은 땅에 대한 호소와 내부적인 갈등도 커져만 갔다. 게다가 아메리카는 단일한 색채가 아니었다. 최초의 약탈에서부터 이미 이후의 인종적인 갈등은 예고되어 있었을 뿐더러, 동서와 남북 간의 시차적, 지리적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뚜렷하게 드러났다.

에스파냐와 영국,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 "대서양의 두 제국"이 펼쳐놓는 대략 3세기에 가까운 시간은, 무언가 큰 사건에만, 피가 흐르고 위기가 닥치는, 그런 종류의 예외성에만 관심을 갖고 열의를 불태우는 것에서 과연 세계에 대해 얼마나 온전한 인식을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게끔 한다. 판타스틱하지 않은 것, 놀랍지 않은 것, 뭔가 특별하지 않은 것, 지루하고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야말로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역사의 대부분이 아닐까. 더군다나 그토록 소란스러운 예외들이 알고 보면 생각만큼 그리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다. 20세기의 역사적 경험은 단지 사람들이 그렇게 보기를 원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얼마든지 예외는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비극적으로 가르쳐주었다.

식민지 사회 역사를 회고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과거의 여러 측면들을 은폐하고 왜곡하게 된다. 과거는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지 나중에 나타난 선입견과 편견에 영향을 받아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 나중에 사실을 다 알고 난 것이 제공하는 유리한 관점에서보다는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맥락에서 사회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은 그들의 범죄와 어리석음을 변명하려거나 경감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수입된 아프리카인들의 운명이 너무나 분명히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영국인들과 에스파냐인들에 의해 수행된 신게계 식민화의 기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범죄 행위로 얼룩져 있다.
- 존 H. 엘리엇 지음, 김원중 옮김, "대서양의 두 제국", '에필로그', 그린비, p.972

어쩌면 세상은 온통 시시함으로만 가득할 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자신이 '자신들의 경험이라는 일그러진 렌즈를 통해서 보는 경향(p.921)'이 있는, 별 특별할 게 없는, 그렇고 그런 시시한 사람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에서 그 시시함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