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나 사회적 이슈를 접할 때 종종 두려움이 들 때가 있다. 사안의 중대함 탓에 느끼는 두려움과는 다른 두려움이다. 나도 모르게 즉각적으로 좋고 싫음을 판단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며, 말하자면 직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특히 낯선 지역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을 때면 그러한 두려움의 실체가 보다 분명해진다. 이 짧막한 단편적인 정보를 통해 나는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가. 스스로의 무지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어떠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워지는 것이다.

남부 백인은 아무리 가난하고 비참할지라도 자기 지역 흑인을 여전히 멸시할 수 있었고, 단호하게 인종적 우월성을 유지함으로써 동료 백인과 유대감을 나눌 수 있었다.
- 앨런 브링클리 지음, 황혜성 외 옮김,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1", '11장 면화, 노예제도, 그리고 구 남부', 휴머니스트, p.526

적어도 나에게 있어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는 낯선 세계와의 만남이었다. 식민개척 이전 시대의 미대륙부터 독립전쟁 이후에 이루어진 사회적 변화 등, 세계사적 사건 위주의 통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생략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들. 질리도록 많이 들어왔고, 그래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미국에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었는지를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무렵(20세기 초반) 기업가는 경쟁의 미덕과 자유로운 시장을 찬양하면서도 경쟁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연스레 작동하는 시장을 거대한 기업연합의 통제하에 두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사실, 맹렬한 경쟁이야말로 미국의 기업가가 가장 두려워하고 제거하려고 노력한 대상이었다.
-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2", '17장 최고의 산업국가', p.313

앨런 브링클리는 갖가지 사회양상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으면서도 전반적인 흐름을 잡아가는 데에 놀라울만한 노력을 기울인다. 서구사에 관심을 갖다보면 16세기와 19세기 전후로 너무나도 달라진 사회상에 심각한 단절감을 느끼게 되곤 하는데,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에서도 그러한 단절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폭넓은 시선으로 변화의 갖가지 양상을 충실하게 그려내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그리고 그 덕분에 역사의 간격이 조금이나마 좁혀지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원자폭탄의 투하 결정에 대한 논쟁에는 감정이 매우 많이 실려 있어서, 어떤 입장을 옹호하든지 간에 옹호자에게는 심각한 전문적 또는 개인적 공격이 가해졌다. 이것을 통해 종종 사회가 그 스스로를 규정하는 방식에 역사가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지와, 또 그렇게 강력한 영향력을 여전히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 '28장 세계대전 중의 미국', p.275

그렇지만 이 책이 갖는 최고의 장점이라면 아마 담담함일 것 같다. 남북전쟁 시기의 인종차별문제라든지, 위에서 인용한 원자폭탄 투하 논쟁 등의 서술에서 특히 이러한 면이 두드러진다. 앨런 브링클리는 섣불리 스스로의 입장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중립성이라든지 객관성, 공정성 등 흔히 지지되는 가치와는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판단을 유보할 수 있는 여유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현재, 내가 사는 곳에서, 내가 가진 가치관을 잠시 접어둘 수 있는 여유. 어쩌면 앞으로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데에 가장 필요한 것은 그러한 신중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