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했다고 하기도 뭐하다. 그냥 한 번 슥 훑어보기에도 벅찬 수준이었다.

뭐 초반에는 별로 어려울 게 없었다. 그냥 이미 아는 내용들을 현대수학의 논리체계로 다시 정리하는 정도였고, 미적분에서 Epsilon-Delta Definition을 접해본 이상, 뭐 이쯤이야.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가랑비에 옷 젖듯 난이도가 올라가더니, 급기야 Axiom of Choice와 그 친구들이 나오는 순간부터 페이지 한 쪽이 그리 무거울 수가 없었다. 씨바 기껏해야 종이 한 장일 뿐인데.

역시 뭐랄까, 기초론에 가까워질수록 어려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하물며 현대 학문체계에서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수학이 그리 빡센데, 그 수학체계의 바탕이 되는 집합론을 잠깐이나마 만만하게 봤던 게 잘못이었다. 뭐 속칭 인문학이란 게 그리 그지 같은 것도 비슷한 이유이겠다. 추상화하거나, 추상에 기대거나, 언어란 그렇게 쌓아올려진 거라 생각하는데, 인문학은 그냥 일상적으로 별생각 없이 쓰는 언어의 개념부터 따져 물으며 시작하니까.

아무튼 심한 과부하에 시달리는 와중에 잠깐 쉬어갈 겸 영화나 한 편 봐야겠다 싶었는데, 마침 선택한 영화가 하필이면 바로 "컨택트"였다. 정말 더없이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선택. 헵타포드를 대하는 인류 중 부분집합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냥 계속 몰라야겠다. 뭐 그런? 무언가를 궁금해 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더러 뇌를 조각내서 다시 조립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뭐, 그런 게 바로 즐거움이고(뭐?), 고로 너무 스트레스 받아선 안 되겠지만, 어쨌든, 참... 많은 위로가 되었다.

뭐 그래도 마냥 어렵기만 한 건 아니었다. 흥미로웠던 이야기도 많았는데, Continuum Hypothesis의 떡밥이 대표적. 현대의 수학체계의 바닥을 다지는 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열찬 고뇌가 필요했는지, 그리고 모순 없는 체계를 만들기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결국 그런 거 없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건 참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들을 안겨다주었다. 게다가 어찌보면 실패? 또는 좌절이라고 할 수 있는 결론에도 불구, 그러한 노력들이 오히려 수학체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욕이 나올..., 아니, 흥미를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언어는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틀일 뿐이다. 인식을 위한 틀. 그러한 틀이 더 이상 사람들의 요구에 걸맞지 않고, 그래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어가고, 그래서 점차 사라져가게 된다면, 그렇다면 뭐 비록 안타까워는 할 수 있더라도 어찌할 수는 없는 일인 것 같다. 어떠한 언어가 더 이상 인식의 확장을 가져올 수 없어서, 그래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된다면, 그냥 유물로 되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수학은 참 공부해볼만 한 가치가 있는 듯. 최소한 수학은 끊임없이 정의define를 다시 돌아보게끔 하니까.

다만 내용과는 별개로 좀 교재에 대한 불만은 있었다. 일반적인 저술도 아니고 연습문제를 풀어야 하는 교재에 답지가 없다보니, 당췌 잘하고 있는건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어 좀처럼 문제를 풀고 싶은 의욕이 나지 않았던 거다. 원론만 붙잡고 끙끙 대기보다는 그냥 일단 문제를 풀어보면서 감을 잡아가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실수는 운명이요, 뭔가를 배운다는 건 오류를 배우는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더욱 갑갑할 수밖에. 특히 집합론 교재들은 유저들이 맹근 솔루션마저도 드물어서 혼자 덕질하는 데에 한결 더 힘이 들었다. ㅠㅠ

뭐 계속 하다보면 어차피 반복해서 보게 될테니 지금으로썬 그렇게나 위안을 삼을 뿐. 쓰다 보니 뭔가 많이 길어져버렸다. ㅋㅋ 여기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