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흡입력 있다. 비교적 짧은 글인데에도 순간 확 빠져들어가게 된다. 칼 슈미트는 명쾌하고 거침 없이 국가권력의 본질에 대해 따져묻는다. 악법도 법이라 할 수 있는가? 법은 정치로부터 자유로운가? 왜 법률은 현존하는 악을 처리하지 못하는가? 정치가 과연 일상의 고통들에 대해 신경이나 쓰는가? 아마 살아가면서 누구라도 부지불식간에 느꼈을 생각들, 그는 곧장 바로 그 지점을 향해 달려간다.

(…) 법률들은 다스리는(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으로서 타당한 효력을 가지고 통용될 뿐이다. (…) 통치하지도 않고 그 법률들을 스스로 집행하거나 적용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효력 있는 규범을 수립할 뿐인 법률 제정 기관에 의해 그 법률들은 만들어진다. 그런 다음, 법률 아래 놓인 법률 적용 공무원들은 이 규범 수립 행위의 이름으로 국가권력을 집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칼 슈미트 지음, 김도균 옮김, "합법성과 정당성", '서설: 다른 국가 형태와 대조되는 입법국가의 합법성 체계', 도서출판 길, p.13

그리고 활극이 펼쳐진다. 혼탁한 법치국가의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스스로 분연히 일어서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의회의 지지부진한 토의는 결국 그때그때의 숫자 상의 우위로 결론날 뿐이다. 사법기관은 기계적으로 법률을 적용할 뿐 실질적인 정의를 실현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결정하기로 한다. 세상에는 친구 아니면 적만이 존재할 뿐이고, 결연히 적을 처단하기로 한 나의 결정에 대해 나는 책임을 질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박수를 쳐주느냐로 나의 정당성은 판가름된다.

주권자란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 예외상태는 원칙적으로 제한 없는 권한, 즉 모든 현행 질서를 효력정지시키는 권한을 포함한다.
- 칼 슈미트 지음, 김항 옮김, "정치신학", '1장 주권의 정의', 그린비, p.16, p.24

낯설지만 한편으로 무언가 낯익은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착각이 아닐 듯 싶다. 극장에서 극악한 악당들을 쳐부수는 히어로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쾌감, 칼 슈미트의 사상은 정확히 그에 대응한다. 나쁘게 말하자면, 히어로물을 진지한 사상체계로 구축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문제의식 자체는 분명히 날카로우며 또 그리 쉽게 부정될 수 없다. 특히나 2/3 이상의 동의를 요구하는 특별다수제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에서 그는 대의제의 본질적 한계를 정면으로 드러내어 보인다. 게다가 '정의justice'의 관념에는 여전히 명확히 개념화되기 어려운, 어떠한 채워지지 않는 열망이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 성급하다. 칼 슈미트는 자신이 제시하는 대안이 이미 스스로가 제기한 문제의식과 정면으로 대치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 불의의 가능성, 즉 '폭정'의 가능성은 그저 형식적인 개념 조작을 통해서, 즉 불의를 더 이상 불의가 아닌 것으로, 폭정을 더 이상 폭정이 아닌 것으로 호명하는 방식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제거된다. 이는 전쟁을 "대규모 또는 소규모 살육이 동반되는 평화적 조치"로 호명하고, 이러한 명명을 "전쟁에 대한 순전히 법률적인 개념 정의"로 지칭함으로써 전쟁을 이 세상에서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되면 합법적 권력은 간단히 '개념 필연적으로' 더 이상 불의를 행사할 수 없게 된다.
- "합법성과 정당성", '제1장 의회제 입법국가의 합법성 체계', p.55

더욱 심각한 문제는, 칼 슈미트가 자신의 논리를 '모든 일에 대한 올바른 결정이란 이미 존재한다'라는 암묵적인 가정 하에 전개한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가정은 세상의 복잡함을 이해할 수 없게끔 하고, 그래서 무시하도록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그 스스로도 인식하는 바대로, 정의는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무수한 오류를 겪으며 숱한 논쟁 속에서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천천히 고민해나갈 수밖에 없다. 로마는 한 순간에 세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완전한 모양을 갖출 수도 없을 것이다. 질서는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요구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