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매우 정교하지만 충분할만큼 정교하지는 못하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때때로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되는데, 동일한 어휘로 똑같은 말을 하면서도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든지, 또는 그와는 정반대되는 경험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 가정을 해보자.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무작위로 2명을 뽑았다고 했을 때, 그들은 과연 서로의 말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의지와 노력을 다한다고 해서 과연 소통이 가능해질까. 각자가 사용하는 언어 체계의 차이를 무시한다고 해도 말이다. 너무 극단적인 가정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탄생에서부터 사람들은 무작위의 시공간에 던져진다. 삶은 끊임없는 무작위성과의 대면인 것이다.

사회는 의미를 구성하는 하나의 체계이다.
- 니클라스 루만 지음, 장춘익 옮김, "사회의 사회", '제1장 사회적 체계로서의 사회, III 의미', 새물결, p.70

무작위성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만들어내기. 에밀 뒤르케임이나 막스 베버 등의 전통적인 사회학이 집합적인 인구집단을 '사회'라는 어휘 아래 실체화하고 그 기능에 주목했다면, 니클라스 루만의 입장은 매우 다르다. 그는 사회를 집합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이의를 제기하는데, 왜냐하면 사회의 본질을 기능성에 두지 않으며, 본질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회는 '오직 커뮤니케이션'일 따름이다(p.117). 즉 사회는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의미 기반으로써 작동하며, 시작도 끝도 없이 언제나 진행 중인 커뮤니케이션은 이미 존재하는 의미 기반 안에서 그 의미들을 사용하는 동시에 유지하거나 변화시키는 것으로 사회를 만들어간다.

문화는 사람들이 익숙한 것 대신에 무엇을 달리 해볼 수 있을지 고려하는 것을 막는다. (…) 자본이란 학습 내지 습득 과정을 상기할 필요 없이 사용 가능한 자원으로 취급될 수 있는, 집적된 과거 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제3장 진화, XIII 기억', p.679-681

따라서 현존하는 구체성은 이중의 면모를 지니게 된다. 사회의 의미 체계는 역사적 우연을 통해 형성된다는 점에서 특별하지만, 또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특별함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현상의 안정성은 개인들을 규범화하여 사회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끔 한다. 그러나 현상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특히나 근대 이후의 점점 심해져가는 사회 분화로 인해, 규범은 도전받는다. "사회의 사회"라는 제목처럼 이를 더 잘 설명할 수는 없을 듯 싶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은 단일 사회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지 못한다. 사회의 분화는 의미 기반의 분화이고, 기성의 커뮤니케이션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각자가 원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찾아나선다. 무작위적이지 않은, 선택가능한 상호작용의 욕구가 커져가는 것이다.

통합을 요구하거나 혹은 통합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 규범적인 통합 개념은 더욱 복잡해지는 사회에서는 점점 더 저항에 부딪힌다. 규범적 통합 개념을 유지할 경우 역설적이거나, 동어반복적이거나, 자기함축적 주장을 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된다.
- '제4장 분화, I 체계분화', p.700

니클라스 루만의 분석에 따르자면, 현대 사회에서 소통의 어려움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불가피한 현실이 된다. 어렵더라도 어찌되었든 소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쩌면 옳겠지만, 반사실적 기대에 불과하다. "만일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이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말조차 할 수 없고, 동일한 데이터를 가진다고도 볼 수 없으며, 단지 그것을 다르게 해석할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케네스 월츠, "국제정치이론", p.26).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사자가 말을 할 수 있더라도 우리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아듣지 못할 때 서로에게 사자가 된다.

"내가 좀 더 낫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나는 남과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치명적이게도, 정확히 이 점에서 모든 개인이 동일하다.
- 'XIII 주관으로의 도피', p.1169

루만 스스로는 자신의 이론이 낙관이나 비관과는 무관하다 말하지만, 실천을 중시하는 행동주의자들에게 그의 이야기는 상당히 비관적으로 들릴 것 같다. 그러나 달든 쓰든, 커뮤니케이션은 이미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공유되는 인식 기반 위에서만 가능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민해보아야 한다. "가치는 주장이 아니라 오직 전제로서만 활성화"되며(p.914), 따라서 설득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합리성을 내세우든, 윤리성을 내세우든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근대를 거치며 실천은 과잉평가되었다. 성인이 된 인간은 단순하고 소박했던 아이 시절로 돌아갈 수 없으며, 세계의 복잡성은 실천을 점점 무책임하게 만든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는 차라리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내지는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가'가 더 합당한 질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