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떤 친구가 책 한 권을 빌려갔었더랬다. 그리고는 얼마 후, 여기저기 메모를 하면서 읽은 탓에 도저히 그대로 돌려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새 책으로 바꾸어주면 안 되겠냐며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이었다.

"증여론"을 읽다 문득 그 때를 떠올리게 되었다. 요즘에는 나 역시 그 친구처럼 책에 꼭 읽은 티를 남겨놓는다. 만약 그 때에도 지금과 같은 습관이 있었더라면 과연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글쎄, 아마 그러지 못할 듯 싶다. 동일한 내용의 똑같은 책이라도 '그' 책은 더 이상 다른 책과 같지 않다. 설령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진 옛 판본일지라도 적어도 내게는 최신판의 깨끗한 양장본보다도 더욱 가치있기 때문이다.

물건이 주어지고 이에 답례하는 것은 바로 '존경'-우리는 이것을 아직도 '예의'라고 부르고 있다-을 서로 주고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뿐만 아니라, 물건을 주면서 그 자신을 주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자신-그 자신과 그의 재산-이 다른 사람들의 '은혜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 마르셀 모스 지음, 이상률 옮김, "증여론", '증여 체계의 발전-후한 인심, 명예, 돈', 한길사, p.193

흔히 인간을 물건짝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마르셀 모스는 물건이라고 해서 물건짝처럼 가벼이 다루어서는 곤란하다고 이야기한다. 물건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효용가치만으로, 혹은 실용적인 목적만으로 물건의 가치가 정해지지는 않는다. 하찮은 물건에도, 값비싸고 어렵게 구한 물건에서는 더더욱, 사적인 감정과 의미부여가 스며들게 마련이다. 따라서 물건을 교환하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사적인 의미를 나누는 행위이다. 기억과 경험을 나누고, 때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존경을 주고받는 수단이 될 때도 있으며, 교환에는 언제나 상대가 필요하기에 상호간의 예의가 요구되기도 한다.

후하게 주는 것이 의무이다. 왜냐하면 네메시스(복수의 여신)는 가난한 사람과 신을 위해, 행복과 부를 지나치게 갖고 있으면서도 베풀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옛 증여도덕이 정의의 원칙이 되었다는 것이며, 또한 신과 정령들은 자신들을 위해 남겨놓은 몫과 쓸데없는 공희(供犧) 때 파괴되는 몫이 가난한 사람들과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 '교환된 증여와 답례의 의무', p.81

이로부터 모스는 소유는 나눌 때에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역설한다. 소비되지 않는 부처럼 무용한 것도 없다. 나누지 않는 것은 곧 그 물건의 '본질을 죽이는 것'이다. 사용되지 않는 소유는 사유에 불과하다며 소유와 사유를 구분지었던 한나 아렌트의 고찰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시민이 너무 선량하고 개인적이기를 바라서도 안 되며, 또 너무 비정하고 현실주의적이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시민은 자기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사회현실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그 자신, 사회와 그 하위집단들을 고려하면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결론', p.257-258

마르셀 모스의 고민은 경제생활에서 소비가 갖는 의미, 어찌 보면 베블런과 비슷한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들의 결론은 비슷하다. 소비는 경제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행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다만 냉소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입장이 강하게 드러나는 "유한계급론"과는 달리, "증여론"은 인간성에 대한 폭넓은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 안에서 어떻게 유의미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에 더욱 촛점을 맞춘다. 마르셀 모스는 과시나 허영도 그 자체로 반드시 나쁘게 여길 이유는 없다고 보았다. 문제는 그러한 심리가 오로지 개인의 목적으로만 추구되는 경우이다. 소비행위가 사회와의 끈을 잃어버릴 때 사회는 물론 개인 자신에게도 해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