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란 무엇일까. 1944년에 출간된 "노예의 길"의 서두에서 찾아볼 수 있는 토로처럼, 7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자유의 의미는 모호하기만 하다. 특히나 요즘에는 자유라는 단어는 남용되는 동시에 협소해져서 마치, 나에게만 좋다면 어떤 일이든 행할 수 있는 자유만 남은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흔히 알려진대로 신자유주의의 대부 격인 하이에크에게 자유란 경제활동의 자유에 가깝다. 그래서 사회는 곧 시장이고, 시장에서는 이윤추구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설파하지나 않을지, 솔직히 의심스럽게 책장을 펼쳐들었다. 하지만 그에겐 무엇보다도 중요한 전제가 있었다. 개인의 양심과 도덕. 하이에크는 행복의 추구를 위해서는 우선 도덕성부터 담보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물질적 상황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분야에서 우리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자유',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을 우리 자신의 양심에 따라 꾸려간 결과에 대한 '책임', 이 두 가지가 그 속에서 도덕적 감성이 자라날 수 있고, 도덕적 가치들이 개인의 자유로운 결정 속에서 날마다 재창출되는 토양이다. 자신의 상관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대한 책임, 강제에 의해 강요되지 않은 의무에 대한 인식, 가치 있게 여기는 것 중 다른 사람을 위해 어느 것을 희생할지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른 결과의 감수와 같은 것들이야말로 바로 도덕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도덕의 본질 바로 그것이다.
-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지음, 김이석 옮김, "노예의 길", '제14장 물질적 조건과 이상적 목표들', 나남출판, p.295

예상 외로, "노예의 길"에는 어떻게 하면 인간의 도덕성을 배양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가득하다. 그냥 시키는대로, 아무런 의심 없이, 위에서 혹은 시스템이 명하는 대로만 하는 것이 곧 노예이며, 민주주의도 결국 (제도적인) 수단 중 하나이기에, 개인들에게 아무런 결정권도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도 얼마든지 전체주의의 위험에 빠져들 수 있음을 그는 경고한다. 따라서 사회는 양심과 도덕심을 훈련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미리 결정내리는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내리며 책임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만 한다.

만약 모든 권력과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이 보통사람이 조사하거나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큰 조직에 의해 장악되었다면, 우리는 조금이라도 민주주의를 보존하고 성장하도록 할 수 없다. 장래의 지도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일반국민들에게 정치적 훈련의 학습장이 되어 주는 충분한 지방자치가 없이는, 그 어느 곳에서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했던 적이 없었다. 보통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므로, 오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숙한 문제들에 대해 책임감을 배우고 실천해 볼 수 있는 곳에서, 오직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라기보다는 나의 이웃이 있다는 의식이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 주는 뜻에서 그들은 공공의 문제에 대해 진정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 '제15장 국제질서의 전망', p.321

20세기 중반은 인간의 자의성이 배제된 시스템을 구축하려던 실험들이 하나씩 실패로 드러나던 순간이었다. 인간 개개인의 윤리적 문제들을 남김없이 시스템으로 구체화하려는 노력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고, 더구나 시스템을 운영하는 권력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하이에크는 정치와 경제를 별개로 분리해서 바라보는 시각을 매우 위험하다고 보았다. 경제적 판단이 곧 정치적 판단이며, 이는 개개인의 양심과 도덕에 근거할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오로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스스로와 이웃들을 인식하는 미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입법에는 한계가 있어야만 한다. 질병이나 사고, 재난처럼 예측불가능한 불안에서 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포괄적 사회보험 시스템'을 조직하고, 사회의 안전을 담보하는 건 국가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특정한 도덕을 제도적으로 강요하거나, 혹은 특권을 보장하는 법은 자유에 있어 위협이 된다. 즉 하이에크에게 시스템이란 개인의 생존과 각자의 양심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위한 목적으로써만 정당화된다.

만약 모든 생산수단들이 한 사람의 손에 귀속되어 있다면, 그 손이 '사회' 전체라는 이름의 손이든 아니면 독재자의 손이든 관계없이, 이러한 통제를 행사하는 자는 우리에 대해 완전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 '제8장 누가, 누구를?', p.165

하이에크의 생각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들이 있으나 여전히 여러가지 의문은 남는다. 첫번째, 과연 현재의 경쟁이 '경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쩌면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생산수단이 점점 더 소수에게 집중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두번째. 정치와 경제가 분리될 수 없는 문제라면 과연 부와 권력도 별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세번째. 위의 질문들과 연계되어, 과연 국가만 도덕을 강요하고 특권을 보장하는 위험에 빠져드는가, 회사든, 단체든, 조직이든, 위계적 질서가 있다면 어디에서나 그러한 위험을 찾아볼 수 있지는 않은가.

자유. 하이에크는 양심과 도덕의 상실을 우려했고, 자유의 가치를 되살리고자 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은 자유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마찬가지로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장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현재의 자유에서는 "노예의 길"이 의미했던 자유를 엿보기란 힘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