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들의 세계사".

좀 뜬금없이 느껴지긴 하지만,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책장을 닫으며 보르헤스의 단편집을 떠올리게 되었다. 물론 보르헤스에게서처럼 신비롭다거나 혹은 시적인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불한당들의 세계사"이다. 좀 더 작은 불한당들, 삶의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불한당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주 가깝고 평범한 삶의 주변에서 돌출되는 불한당들을 그려나간다.

그는 자신의 비열한 언행에 대해 모든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언젠가 <어째서 당신은 그를 그토록 증오하시오?>라는 질문을 받았던 일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때 그는 어릿광대의 파렴치한 발작 증세를 일으키며 이렇게 대답했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사실 그는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내가 그에게 양심에 꺼리는 짓을 했지요. 그런데 그런 짓을 하고 나자 곧바로 그가 증오스러워지기 시작하더군요.>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p.155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가장 인상깊은 점은 기대들이 자꾸만 배신당한다는 점이다. 불한당들의 세계는 결코 아름답지도 않을 뿐더러,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것도 없다. 무언가 하나의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싶을 때면, 어김없이 다른 이야기들과 맞물리며 다시금 되살아난다. 예측이나 기대, 혹은 단정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부정당한다. 주인공이라 부를만한 인물을 허용치 않는 구성에, 어떤 특정한 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도 점차 조심스러워진다. 마치 연극처럼 장황한 대사에서는 좀처럼 속내를 확인하기가 어렵기만 하고, 어쩌다 존경할만한 행동이나 인물들이 누추한 누더기가 되어 모욕을 당하는 광경에서는
가히 허무주의의 향기마저 느낄 수 있다.

어찌보면 막장드라마를 연상케하는 한 편의 지저분한 치정극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선악의 문제로 접근해간다. 그는 선을 권하고 악을 벌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선악의 경계가 얼마나 불분명하고 쉽게 깨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남겨놓는다. 무엇이 선이고, 또 누가 선을 말할 수 있을까. 때로는 허세가, 때로는 독선이, 또 때로는 수치심이나 자존심이, 지식이나 믿음, 명예, 사랑을 가장하기도 한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악은 특별하지 않다. 불한당들은 언제나 삶으로부터 돌출되어 배척받는다.

세상은 자유를 선언하였고, 현대에 들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만, 그들의 자유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것은 예속과 자살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욕구가 있으면 충족시키시오. 당신들도 귀인들이나 부자들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소? 욕구 충족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더욱 증대시키시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세상의 교리이며, 세인들은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구 확대라는 권리는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부자에게는 <고독>과 정신적 자살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질투와 살인을 낳았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권리를 주었으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미처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로 하나로 합쳐지고, 이로써 거리를 줄여 나가고 허공을 통해 사상을 전달하는 형제적 관계를 형성해 나갈 거라 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아아, 인류의 그 같은 결합을 믿지 마십시오. 자유를 욕구의 증대와 신속한 충족으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왜곡할 뿐입니다.
- p.551

분명한 건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합리성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의 합리성이 선이 무엇인지를 규정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고 한다면, 과연 인간은 그러한 선을 어떠한 순간에라도 고수할 수가 있을까, 어쩌면 이러한 믿음들이 인간에게서 겸손을 잃어버리게나 하지 않을까.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현재의 악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것, 그마저도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 길인지에 대한 조심스러운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