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왜 존재하는가. 선과 악, 절대적인 판단기준이 사라진 시대이기에 제프리 버튼 러셀의 질문은 무척이나 낯설고 시대착오적으로 들린다. 분명 현대의 합리적 사고로 악을 증명하거나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다시금 묻는다. 그렇다고 해서 악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냐고.

항상 악을 이해하려 한다면 은유나 형이상학에서 개별적인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수치는 현실을 가릴 뿐이다. … 그리고는 쉽게 잊혀진다.
-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영범 옮김, "데블", '1. 악의 문제', p.20-21

만약 당신이 답을 원한다면, 단지 책의 뒷장을 보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에서 비껴가는 행위요 일종의 도피다. 악을 있는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 보려 하지 않고, 단지 우리 인생에서 제거해야 할 '문제아'로 파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악은 우리가 긴 인생의 여로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모든 고통, 고뇌, 허탈, 상실, 부정의 등에서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삶을 이끌어나가려면 이런 문제를 매일 대면하고 계속 해결해야 하고, 그리고 그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 "사탄", '1. 악마', p.15

제프리 버튼 러셀은 '악'을 실증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대신, 삶의 고통으로부터 비롯된 추상적인 개념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악이라는 개념에는 모든 고통이 담겨있다. 자연재해나 질병처럼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고통부터 의도적인 범죄까지 "악의 역사"는 시대에 따라 악이 어떻게 설명되어 왔는지를 추적해나간다. 악의 개념으로부터 생성되어 인격화된 악, 악마(들), 기독교를 통해 수용되고 구체화된 악마, 사탄과 루시퍼, 신과 더불어 세속화되고 점차 근대이성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던, 메피스토펠레스 등 방대한 분량의 저술은 악마가 사라지고 사실상 악에 대한 설명도 포기해버린 현재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대부분의 마녀광란은 엘리트들이 조작해낸 것이었고, 점차적으로 교단이나 법정으로부터 자신들의 문제들을 해명하는 근거로 마녀광란을 탐욕스럽게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갔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랐지만, 그 지역에서 발생한 재앙이나 사회적인 긴장 때문에 사태가 악화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종교개혁으로 종교적 사회적 긴장관계로 인해 악화되었다. … 더욱 중요한 것은 종교적인 반대자에 대한 선전전을 벌일 때 악마의 도움을 빌리고자 하는 유혹이었다.
- "메피스토펠레스", '2. 종교개혁 시대의 악마', p.33-35

1700년대 교육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 교육을 받은 사람의 수는 항상 미미했다.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귀족이나 부르주아 사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기독교를 마치 한여름의 스카프처럼 걸쳐 자신들의 쾌락주의나 이기심을 가리는 장신구처럼 사용하였다.
- '4. 죽어가는 사탄', p.198

다만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 "악의 역사"가 개념에만 집중한다는 점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전반적으로 각 시대를 대표하는 주요한 저자들의 텍스트들을 잘 정리해놓은 개론서를 접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또한 '인격화된 악'으로 구성된 시대의 구분이 구체적인 악의 양상보다는 신과 악마에 대한 신학논쟁 쪽으로 무게가 기울게 한다는 점도 지적할 수밖에 없겠다. 악의 역사라기보다는 악마에 대한 지성사에 가깝다고 해야겠지만, 어려운 개념들을 말끔하게 정리해놓았다는 건 장점.

제프리 버튼 러셀의 생각처럼 비록 규정될 수 없다고 해서 질문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악은 사라지지 않았고, 문명이 확장될수록 오히려 악에 대한 반응은 예민해져간다. 악을 바라본다는 것. 삶에서 느끼는 고통을 악으로 바라보려는 그의 고민은 여러모로 곱씹어볼만 하다. 외면하려고 할 때 악은 점점 커져가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