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헨릭 시엔키에비스의 "쿠오바디스"를 떠올리게 한다. 로마에서 일본으로, 기독교 태동기에서 17세기로 박해의 순간만이 달라졌을 뿐이다. 마치 베드로처럼 "침묵"의 로드리고 신부도 기꺼이 죽음을 각오하며 박해의 장소로 걸어들어간다. 하지만 엔도 슈사쿠의 필체에는 지극히 무미건조하다. 죽음은 그저 죽음일 뿐이고, 순교 역시 그저 그런 죽음의 하나에 불과하다. 박해의 장소에서 그가 깨닫게 되는 것은 무거운 침묵 뿐이었다.

그가 혼란에 빠진 것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뜰 안의 정적과 매미 소리와 파리의 날개 소리였다. 한 인간이 무참히 죽었는데도 바깥 세상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과 다름없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바보스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순교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왜 당신은 침묵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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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땅에 어둠이 임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이것이 오랫동안 생각해 온 순교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본 농민의 순교는 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오두막, 저 사람들이 입고 있는 남루한 옷처럼 초라하고 가련하기만 했다.

- "침묵",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홍성사, 2011, p. 186-187

침묵하는 신. "침묵"에서 순교자의 죽음은 아름답지도 숭고하지도 않다. 그 흔한 성화에서처럼 아우라가 피어나지도 않는다. 세상은 그가 죽건 말건 아무런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 하나 울어주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그렇다고 누구 하나 야유하는 사람조차도 없다. 오로지 그가 믿는 신과 처형자만이 그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 처형자는 그저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를 증오하거나 사랑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하지만 신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다. 기꺼이 신을 위해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도.

견고한 침묵에 무너져가는 로드리고 신부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의 상념이 들었다.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그를 비겁자라 부르며 분노한다. 혹은 그의 연약함에 대해 때때로 동정이나 연민을 품을 때도 있다. 그렇다면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신에 대해서도 어쩌면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을까. 만약 신이 정말로 있다면, 신의 침묵 앞에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비겁함을 비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숭배나 찬양은 커녕, 연약한 인간의 동정이나 연민을 받아야 하는 그런 연약한 존재인 것은 아닐까.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상당히 다른 감상을 낳은만한 작품임에 분명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신은 나를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