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가하면 추워져버렸던 5월의 하루. 따뜻함으로 기억하던 전주영화제의 봄도 전에 없는 차가운 현실의 한기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소란한 거리는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는 경복궁길, 점점 사람이 늘어만 가는 것 같은 삼청동과 인사동의 거리, 무수한 행사를 준비하는 손길로 분주한 시청 주변의 풍경들, 그리고 또 불과 몇 달만에 기억을 바꿔놓는 거리는 점점 어지로워지기만 한다.



갤러리 진선, "여행Ⅲ", 2012.05.10 ~ 2012.05.24
출처 : 네오룩닷컴 

걸음은 가볍지 못했다. 모처럼만에 미술관 마실을 나선 걸음은 그저 몸의 기억을 되살리려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함께 했던 동행인 역시 이런 기이한 느낌을 애써 떨쳐내려는 듯 담백하고 소탈한 작품으로만 눈길이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버스에서 내렸던 그 순간부터 그 거리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옆집갤러리의 전현선 작가의 동화 "Road to Endless Oppotites, 2012.05.04~2012.05.22"와 전영근 작가의 퐁퐁퐁 뭉게구름처럼 퍼져가는 여행의 풍경에서 동행인은 눈을 떼지 못했다. 점묘는 더 이상 사실을 원하지 않았다. 칼날은 나무를 깎고 물감을 덧칠할 뿐 우리를 위협하지 않았다. 전시장은 도피처였고 휴식처였다. 동화 그 자체보다, 여행 그 자체보다도 더욱 평온한.




노순택, 망각기계I-김완봉,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40×100cm, 2005~11
학고재, "망각기계", 2012.05.04 ~ 2012.06.10
출처 : 네오룩닷컴 

하지만 도심에서 휴식은 잠깐일 뿐이다. 따가운 햇살에 자켓을 벗어든 채 오랜만에 찾은 갤러리는 서먹서먹하게 자꾸만 발걸음을 밀어내고 있었다. 들어서기가 무섭게 발걸음을 돌릴 때마다 동행인은 이건 거짓말이야라며 누가 들릴새라 나직히 중얼거렸다. 시내 곳곳에 설치된 텐트와 현수막, 세종문화회관 맞은편에서 느껴지던 기이한 긴장감은 줄곧 불길하게 따라다니다 학고재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차가운 냉기만을 찾아다니는 노순택 작가의 잿빛사진들은 거리의 냉기를 온전하게 품고 있었다. 그의 사진 안에서 인간은 오로지 잊혀지기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그리고 오로지 끊임없이 기억들을 잊어가는 망각기계에 다름아니었다. 하지만 이 쓸쓸한 전시에서 가장 섬뜩했던 건 전시장을 가득 채웠던 회색의 사진들이 아니라, 통로 중에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버려진 전단 한 장이었다. 주의깊게 보지 않았다면 그저 스쳐지나가고 말았을 전단 한 장. 노순택 작가는 전시장 밖에 예리한 상처를 하나 버려두었다.




김상돈, 불광동 토템–면접, 2012
서울시립미술관, "SeMA 청년 2012 : 열두 개의 방을 위한 열두 개의 이벤트展", 2012.04.10 ~ 2012.05.17
출처 : 네오룩닷컴 

그리고 뒤늦게서야 찾아 미처 되새길 틈조차도 없었던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에서는 그야말로 스스로의 게으름을 한없이 탓해야만 했다. 아마도 하루의 발걸음이 그리도 무거웠던 이유는 바로 그저 하루하루에 바빠 미처 주위를 둘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이런 게으름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2명의 작가와 12명의 방,  빛이 없다면 누군가가 말을 걸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형들의 세상을 만들어낸 노진아 작가의 설치작품이나, 실재와 비추어지는 것 사이의 괴리를 탐구해온 한경우 작가,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의 대한 볼품없는 변주를 펼쳐놓은 듯한 진기종 작가, 순백의 폐허로 실제를 지워버리는 하태범 작가, 숭고를 비웃으며 관료적 언어를 희화화해내는 파트타임스위트, '신은 너를 용서하지만 나는 그러하지 않으리라God 4gives u but I do not'라며 종교라는 이름으로 위장해놓은 인간의 공통된 두려움과 저열한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김기라 작가, 끝없는 기술발전의 미래상을 우울한 디스토피아적 사계로 경고하는 이진준 작가의 작품 등, 12개의 방은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끊임없이 이어져갔다.

그 중에서도 김상돈 작가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면접을 보는 입사지원자의 한 명이 되어버리는 놀라운 경험을 해야만 했다. 벽은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입사동기와 포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인재인지 예리한 눈초리로 샅샅히 훑어보려 한다. 벽의 시험을 통과하면 나는 마침내 장원급제된 사람처럼 꽃가마로 단장된 의자에 앉아 성공의 가도를 달리게 되리라. 그 의자가 사실은 얼마나 볼품이 없는지, 양파냄새가 찐득하게 배어들어 악취를 풍기게 된다는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절에서, 교회에서, 자식의 성공을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부모님의 기대를 만족시키고, 여전히 면접을 봐야만 하는 다른 이들의 선망어린 시선을 받을 수만 있다면야.



5월, 가정의 달, 따뜻한 햇살, 봄소풍, 은혜와 소중함을 기리며 이어졌던 날들. 서울시립미술관을 나오며 그 앞에서 자리잡은 국제 엠네스티의 활동가를 본다. 시청광장을 지나며 5.18기념식의 사전준비풍경을 본다. 청계천을 지나며 6.25사진전에 자랑스레 붙여놓은 기네스북 인증서를 본다. 가로수에 물을 뿌리는 급수차와 경찰버스가 도로 위를 달린다. 따사로웠던 햇살이 어느샌가 사라지고 쌀쌀한 바람이 어둠과 함께 불어온다. 하루가 지날수록 기억이 힘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