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소식들로 꽤나 시끌시끌했던 오늘, EIDF에서도 하나의 사고가 있었네요. 국내 신작다큐 중의 한 편인 "잔인한 계절"이 방송을 앞두고 불과 몇 시간전 돌연 방송부적합 판정을 받고는 상영취소가 되었어요. 쓰레기를 청소하며 살아가는 환경미화원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 도시의 어둠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보여주며 부산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영화제서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기도 했죠. 비슷한 소재의 작년 EIDF 개봉작 "쓰레기의 꿈"도 깊은 인상을 남겼었기에 이집트 사회와 한국 사회 사이의 대비감도 살짝 엿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답니다. 이런 예기치 못한 휴식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허탈감과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네요. -_ㅠ


색상구분 : 기개봉작 / 베스트 / 워스트 / 문제작


"사운드 라이크 레볼루션 Sounds Like a Revolution"
"즐거운 어머니날 Happy Mother’s Day"
"데이비드 지우기 Erasing David"
"황혼 금메달 Autumn Gold"
"잔인한 계절 Cruel Season" ※상영취소
"태양 아래 흐르는 소리 Sounds Under the Sun"
"나일 수도 있었던, 혹은 나인 사람들 People I Could Have Been and Maybe Am"

본격적으로 감상기를 쓰기 전에 우선 오늘은, 첫 날부터 한 편 두 편씩 조금씩 선보이던 "지구를 위한 2분"에서 반가운 작품이 하나 있었네요. 지아 장커 감독의 "스틸 라이프"의 몇 장면들이었는데요, 새로운 작품이 아니라서 아주~ 조금 아쉽기는 했어요. ㅋㅋ

오늘의 시작은 첫 날과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했네요. "사운드 라이크 레볼루션"은 사회적 문제로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르는 미국 인디뮤지션들에 관한 내용이었죠. 90년대를 불태우고 여전히 왕성히 활동 중인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이나 "로 앤 오더 - 성범죄전담반"으로도 익숙한 아이스티가 등장하며 뜨거운 분위기를 이어갔네요. 사회적 이슈에 대한 의견을 밝히기 순간 즉시 메이저레이블과 방송사에 의해 찍히는 낙인은 왠지 그리 아주 낯선 풍경도 아닌 듯 싶었어요. 단순히 리더의 말을 잘 듣고 무조건 예스만을 외치는 것만이 애국이 아니라는 뮤지션의 당당한 외침도 기억에 남았구요,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어쩌다 한 번 성공하고 또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해야한다는 또 다른 뮤지션의 이야기는 조금쯤은 슬프게도 들렸답니다.

"즐거운 어머니날"은 다섯쌍둥이를 출산한 한 가정에 대한 미디어의 관심 속에서 펼쳐지는 웃지못할 촌극을 담은 다큐였죠. 이 작품은 전주에 이어 EIDF에서도 극장으로 개봉된 "트루맛쇼"를 묘하게 연상시키기도 했는데요, 미디어의 쏟아지는 관심으로 인해 지친 가족들을 배려한답시고 펼쳐지는 토론장면에선 그 가족을 어떻게 관광상품으로 유치할지에 더욱 관심을 쏟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죠. 가족들을 위한 퍼레이드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로 아수라장이 되는 풍경을 담은 마지막 장면은 이 희극을 매우 인상적으로 마무리짓는 명장면 중의 하나였답니다. ㅋㅋ

"데이비드 지우기"는 인터넷의 발달과 그로 인해 축적된 개인정보 데이터베이스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작품이었어요. 툭하면 어디가 해킹되어서 개인정보가 대량으로 유출되었다는 뉴스가 뜨고, 어디선가 폭풍처럼 스팸문자와 메일이 날라오는 현실이기에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이야기였던 거 같아요. 처음엔 감독의 모습이 조금 과다한 편집증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아마존에서 받은 그의 쇼핑내역에 대한 두툼한 보고서를 봤을 땐 순간 소름마저 끼쳐올랐네요.


"황혼 금메달"의 포스터


"황혼 금메달"은 정말 예상 외의 큰 수확이었어요. 80세에서 100세까지만 참여할 수 있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있다는 사실부터 놀랍기 그지없었죠. 100미터를 17~9초대에 달리는 할아버지를 보니, 학창시절에도 그래본 적이 없었던 저 자신을 심하게 반성하게 했네요. 특히나 100세의 나이에 원반던지기에 참여하려는 한 할아버지의 의지에서 둘째 날의 "썬더 소울"에서도 느꼈었던, 무언가에 애정이 있는 사람만이 지닌 꺾이지 않는 힘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어요. 현재는 비록 노령층만의 대회에 머물러있지만, 언젠가 청소년선수권대회만큼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거워하고 축하할 수 있는 대회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태양 아래 흐르는 소리"는 저도 잘 모르지만 통영국제음악회와 같은 특별한 기회가 아니면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현대음악가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였어요. 음악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 그리고 소리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앞선 "사운드 라이크 레볼루션"과 비록 방향은 다르지만, 오로지 시끌시끌한 팝뮤직만으로 가득한 현재의 TV에서 신선한 자극과도 같았어요. 마치 장인처럼 한 곡 한 곡 섬세하게 다듬어가는 17명의 작곡가와 또 이를 차근차근 인내심있게 재현해내는 합창단, 그리고 이 둘의 중간에서 이어주는 지휘자의 노력이 모두 한데 어울려 만들어지는 공연은 정말 직접 볼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아쉽게만 느껴졌네요. 과연 이런 순수한 감동을 느껴본 적이 과연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질 않네요. -_ㅠ

"나일 수도 있었던, 혹은 나인 사람들"은 차갑기만 한 런던의 거리를 담아낸 작품이었어요. 거친 휴대폰의 영상과 타이핑만으로 이어지는 나레이션은 이 작품을 지독하게도 건조하게 만들어주었죠. 휴대폰만을 든채로 거리로 나선 감독은 가족과 떨어져 외로움에 지쳐버린 듯 허무한 관계를 이어가는 한 여자를 만나고, 역시나 가족과 떨어져 공허한 눈빛으로 마약에 빠져버린 한 남자를 만나고, 또 그를 통해 역시나 공허한 눈빛으로 알코올에 빠져버린 한 여자를 만나죠. '내가 살아간다고 믿는 현실이 있고, 또 실제로 살아가는 현실이 있다. 그리고 그 둘이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던 나레이션이 무척이나 와닿았네요. 약간은 극사실주의적인 느낌마저 풍겼던 이 작품은 아마도 오늘 상영이 취소된 "잔인한 계절"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지 않았을까하는 약간의 여운도 남겨주었답니다.

이제 드디어 마지막 날이네요. ㅠ_ㅠ 내일은 부디 오늘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없길 바라며, 시상식도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