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난만하면서도 또한 집요한 소설.

이 책은 흔히 역사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사실에 대한 기록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렇다고 10개의 단편과 하나의 에세이로 구성되는 10 1/2의 챕터가 시간적인 순서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툭툭 던지듯 전혀 다른 이야기들, 하지만 아주 관련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이상한 구성.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는 일종의 도전이다. 그는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도전을 하고, 서구백인남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도전을 하고, 나와 다른 이를 가르는 구분과 오해, 선입견에 도전을 한다. 아주 뻔뻔하게도 은근슬쩍 화자를 바꾸어버리는가 하면, 또 실컷 이야기를 풀어내다 어느 순간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빠져들기도 한다. 마치 매끈하게 정리된 교과서의 역사를 비웃기라도 하듯.

천진난만한 냉소로 풀어가는 줄리언 반스의 역사이야기(?)는 재미있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방대한 분량으로 기록하더라도 결코 전부라곤 말할 수 없는, 역사책 안의 글자들 사이에 주렁주렁 맺힌 못다한 이야기들을 궁금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곤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매일의 거품 같은 뉴스를 팔에 방울방울 주사 맞으며, 현재라고 하는 병원에 누워있"기에. 영화 "왝 더 독(Wag The Dog, 1997)"이 짜릿하게 묘사해냈던 것처럼, 사실 그 자체보단 사실적인 것들이(더 나쁘게 말하면 사실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이) 더욱 호소력을 발휘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