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왜 희생해야 하는 사람은 항상 나 같은 사람이어야 하는 거지, 왜 뭔가를 양보해야 할 때가 되면 양보를 해야 하는 건 우리여야 하지, 왜 자기 혀를 깨물어야 하는 게 나여야 하지, 왜?
- "죽음과 소녀",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김명환·김엘리사 옮김, 창비, p. 239-240



엄청난 힘이다. 분노와 죄의식 사이에서 아리엘 도르프만은 끊임없는 방황을 한다.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희곡은 한 편 한 편이 크나큰 울림을 준다.

토니 쿠쉬너와 함께 작업했다는 "과부들"에서는 (왜 꼭 거장들은 일찌감치 서로의 재능을 알아보는 것일까라는 심각한 의문과 함께-_-;) 브레히트의 "루쿨루스 심문(The Trial of Lucullus)"을 보다 극적으로 만들었다고 할만큼 역사로부터 늘 소외되어 기다리기만 할 뿐인 이름없는 개인들의 분노를 이야기한다. 그의 대표작 "죽음과 소녀"역시 마찬가지이다. 해롤드 핀터에게 헌정하는 이 작품은 (왜 꼭 거장들은 일찌감치 재능을 발휘한 거장들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것일까라는 또 다른 심각한 의문과 함께-_-;) 슈베르트의 선율에 화해하기 어려운 상처를 덧씌운다.

한국관객들을 위해 특별히 집필했다는 "경계선 너머"는 네 편의 희곡 중에서 희극성을 지닌 유일한 작품으로, 어느날 갑자기 집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게 되는 국경선으로 인해 생기는 해프닝을 그려낸다. 인간이 제멋대로 지도에 그려놓은 경계의 부조리. 요즘같은 시기이기에,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차마 웃어넘기기 힘든 웃음을 준달까.

그리고 "연옥"은 뭐랄까,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보여준 디즈니에 대한 신랄한 비판 때문인지, 아리엘 도르프만식의 "뮬란"처럼 느껴졌다. "죽음과 소녀"에서도 얼핏 드러나는 서구사회의 문화적 성취와 그 이면의 어둠. 칠레의 피를 가지고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고, 다시 칠레에 돌아왔다가 또 다시 추방되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야했던 아리엘 도르프만이 지닌 평생의 고민이 담긴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결론은, 아리엘 도르프만이라는 작가를 알게해준 다큐멘터리 "아리엘 도르프만의 망명일기"를 봐서 정말 다행이라는 것, 그리고 각 희곡마다 첨부되어있는 '작가후기'가 무척이나 훌륭한 보너스였다는 것, 그리고 그의 저서들을 발견할 때마다 지갑이 얇아지게 생겼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