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화, 지성화, 세련화, 도시화 등등은 문명화와 비슷하게 쓰이는 낱말들이다.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한국의 한강의 기적 등을 경험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산업화의 의미가 다소 강해보이는 딱딱한 단어이기도 하다. 어찌되었든 문명화라는 단어는 근대화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는 "문명화과정(Uber den Prozess der Zivilisation)"에서 사소하게 넘길 수도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유럽에서 문명화의 의미를 추적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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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스는 문명화의 발생지점을 궁정이라는 특수한 장소에서 찾는다. 저자의 다른 저서 "궁정사회(Die hofische Gesellschaft)"에서도 언급하듯, 18세기의 프랑스의 궁정은 상류계층과 하류계층이 뒤섞여있는 장소였다. 그는 낭만주의와 엘리트주의, 그리고 시민사회의 성장이 맞물리던 가운데, 상류계층이 하류계층과 스스로 구별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써 문명화가 생겨났다고 말한다.

"문명화과정"은 현재의 문명인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습속들에 의문을 가진다. 저자는 상류층과 하류층이 중세처럼 완전하게 구분되어 있었을 때에는 이러한 문명화의 필요성이 없었다고 단언한다. 실제로 깔끔함과 청결이 몸에 베어있는 현대인들에게 궁정사회 이전의 모습은 낯설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왕의 권력 아래 시민계층이 점차 성장하고 뒤섞이기 시작했던 궁정사회에서, 상류층은 자신들을 시민계층과 구분해야할 필요에 직면한다.

엘리아스는 식사나 배변, 언어 등의 역사를 통해 상류층이 예절을 중요시하게 된 과정을 보여준다. 상류층들은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차이를 원했으며, 일상생활의 모습은 그들의 요구가 가장 부합하는 지점이었다. 궁정사회 속에서 계급상승의 욕망이 있었던 하류층들로 인해 상류층의 생활양식이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상류층은 하나씩 규칙을 만들어나가며 예절을 점점 더 정교화했다. 그는 예법서의 변천과정을 서술하며, 위생의 관념이 상류층의 예절을 합리화하는 수단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상류층과 하류층의 끝이 없는 경주는 문명화라는 단어가 되었고, 이후 식민지 시대가 열리면서 서양의 열강들이 스스로에게 한 가장 강력한 변호 또한 문명화가 되었다.

결국 "문명화과정"에서 문명화란 자신과 타인을 향한 태도에 대한 것으로 집약된다. 저자는 문명화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큰 부작용으로 일상생활에서의 과다한 절제를 꼽는다. 현대사회는 지나치게 깨끗하고 반듯하다. 불결하고 흐트러진 것들은 경멸당하기 일쑤이다. 관계 속에서 맺는 자기통제의 심리적 압박들은 문명화와 함께 강해져왔고, 엘리아스는 이를 수치심을 통해 설명한다. 그는 '창조적 지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사회의 과다한 통제기재가 개인이 가진 특출난 재능의 함몰을 낳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그렇다고 엘리아스가 바라보는 문명화가 마냥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문명화는 권력의 중앙집중화와 함께 하며, 분업을 발달시킨다. 실제로 관료제의 역사는 분업의 역사이기도 하다. 분업의 상황에서는 각자 맡은 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엘리아스는 분업으로 인해 권력의 역전현상이 나타났으며, 또한 폭력의 양상이 물리적 힘에서 경제적 힘으로 전이되었음을 역설한다. 더 이상 사회를 어느 한 사람이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흐름에 놓인 것이다.

엘리아스에게 있어 문명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사회가 점점 더 수평적인 권력을 향해 진행할 것이라 믿으며, 또한 과다한 절제도 반작용을 거쳐 관용에 다가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다소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엘리아스가 말하는 징후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가 없다. 과연 언제쯤이나 그가 만족할만한 문명화를 이룩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예측이 어긋나지 않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