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특별하지 않다. 사회와 시대의 한계는 예술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되며, 제도 안에서 제도와 공생하는 또 하나의 제도이기도 하다. 가령 전쟁영웅을 추앙하는 사회라면 예술도 전쟁영웅을 기리게 마련이다. 종교적인 시대에서는 종교적 주제가 곧 예술의 주제가 되고, 길드 체제가 확고한 사회에서는 재능이야 어떻든 길드에 속하지 않은 조각가는 활동할 수 없다. 단순하게는 선택가능한 재료부터, 기술 및 지식 수준, 사회적 통념에 이르기까지 예술은 현실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정치적 실천을 기독교적 이상과 분리시킨 '마키아벨리즘'은 마키아벨리가 창안한 것은 아니다. 당시의 중·소 군주들은 모두가 이미 완전한 마키아벨리주의자들이었다.
-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옮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매너리즘', 창작과 비평사, p.162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예술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발터 벤야민이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주의를 기울였던 것처럼, 아르놀트 하우저 역시 예술 그 자체보다는, 예술에서 마치 거울에 반사되는 빛처럼 새어나오는 시대상의 변화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에게 예술은 현실과 유리된 우아한 취미로 머무르지 않는다. 과감하게 세월이 덧씌워놓은 아우라를 벗겨내고 그 속에 잠재된 현실들을 끌어내려 하는 것이다.

예술에서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모사한다든가 자신들의 사회적 환경을 묘사하는 것은 대체로 보수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사회계층, 말하자면 사회에서 그들의 위치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억압되어 있거나 상승하려는 계층은 그들이 목적으로 설정한 생활상태의 묘사를 보기 원하지,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빠져나오려 하는 현재 생활 상태의 묘사를 원하지 않는 법이다.
- p.191

작품에 앞서 시대상을 보라. 예술은 곧 표현이라는 아서 단토의 말을 빌려 이렇게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 예술이란 한 사회가, 한 시대가, 보고자 했던 것들을 표현해왔던 것이라고.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개인적으로 예술에 대한 생각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시각이 '무엇이 좋은 예술인가'라는 질문 대신 다른 질문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즉 예술이 시대의 산물이라면, 작품으로써가 아니라 현실들의 유물로써 예술을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었다.

현실주의자란 언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싸워야 하고 언제 남에게 양보를 해야만 하는가를 아는 사람이고, 변증법자란 그때마다의 역사적 상황이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여러 동인과 과제가 서로 뒤엉켜 생겨나는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낭만주의', p.216

고딕과 매너리즘의 관계를 마치 근대의 이상이 좌절된 후 찾아온 탈근대의 냉소와 같이 풀어내는 등, 출간된지 반세기가 훌쩍 지났으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예술비평으로써도 여전히 흔치 않은 독창성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소위 중세적 질서에 대해 편파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지나친 호의를 보인다는 점은 지적해두어야 하겠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이 저술이 단순한 예술론이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아르놀트 하우저는 예술을 하나의 독자적인 영역으로 바라보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현실과 '뒤엉켜 생겨나는 것'으로 다루려 했다. 예술은 특별하지 않다. 그 말은 곧 순수한 예술 같은 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