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는 다른 제목을 붙여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가족애의 탄생, 근로자의 탄생, 교육과정의 탄생 등은 좋은 후보이다. 유치함의 탄생이라든지 혹은 미숙함의 탄생 등은 더욱 괜찮아 보인다. 풍속화 등의 회화작품에서부터, 예절서와 회고록, 그 외의 잡다한 기록에 이르기까지, 필립 아리에스는 일상의 공간이 14세기 이래로 어떻게 분리되어 왔는지를 추적해나간다.

공동체의 종교 의식과 그러한 의식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는 놀이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나중에 그러한 놀이는 종교적 상징성과 공동체적 성격을 잃고 차츰 개인적이고 세속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세속적이고 개인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면서 점점 아이들만의 것이 되었다. 아이들 놀이의 레퍼토리는 마치 어른들과 세속화된 사회가 포기한 공동체의 집단 활동들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 필립 아리에스 지음, 문지영 옮김, "아동의 탄생", '4장 놀이의 역사에 관한 소고', 새물결, p.141

"아동의 탄생"에는 일상세계의 대대적인 변혁이 함축되어 있다.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세계가 그리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아이들은 작은 어른이었고, 아이들의 놀이는 곧 어른들의 놀이기도 했다. "사생활의 역사"에서도 엿볼 수 있듯, 가족 역시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었으며, 일과 축제, 종교 등은 삶 속에 혼재되어 별다른 별개의 공간이 요구되지 않았다.

필립 아리에스의 관찰에 따르자면, 근대적 감성이 낳은 가장 큰 변화는 '분리'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그는 이 책에서 학교라는 공간에 주목하는데, 왜냐하면 학교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아이들을 분리시키는 역할을 했을 뿐더러, 또한 아이들 사이에서도 학습과정에 따라 또 다른 분리를 수행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 사이의 개별적인 편차는 점점 무시되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차이는 더욱 명확하게 인식되었다.

"아동의 탄생"은 근대적 감성이 지닌 이중성과 궤를 함께 한다. 아이들은 순진하고 순결한 존재인 동시에, 유치하고 미숙한 존재가 되었다. 또한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인 동시에, 엄격한 규율로 통제되어야 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가족의 공간에서 이러한 이중성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자마자 그 미숙한 존재들을 무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현대적 생활양식은 옛날에는 융합되어 있던 요소들인 우애, 종교, 직업이 서로 분리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애와 종교 같은 일부 요소들에 대한 억압의, 또한 중세에는 부차적인 중요성밖에 갖지 못했던 다른 요소, 즉 가족의 발달의 결과이다.
- '5장 규율의 발달', p.401

따라서 필립 아리에스에게 "아동의 탄생"이란 비사회적인 인간의 탄생과도 같다. 공간의 분리는 개개인의 공간을 협소하게 만들고, 이는 불관용과 편협한 감성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근대세계는 개인들이 닮은 점으로 서로를 확인하는 세계였다. 그리고 끝없는 혐오와 상대에 대한 불신만이 남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