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일이라는 단어에는 양극단의 감정이 담겨있다. 한편에서는 땀흘려 일해서 얻어내는 성취의 감상이, 또 한편에서는 월요일의 고통와 금요일의 기쁨으로 굳어져버린, 반쯤의 냉소가 자리한다. 아버지(혹은 어머니, 남편, 아내, 자식 등등)와 직장인이 거의 동일한 범주의 인물들을 가리키면서도 그 감정의 온도가 사뭇 다른 것만큼, 일은 생계의 수단으로써만 그 의미가 한정되거나 혹은 성공과 성취 내지는 자아실현을 이루어내는 (교과서적인, 그리고 약간은 순진한) 과정으로도 인식된다.

하지만 일은 무엇보다도 일상의 가장 주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하루에 8시간 일한다고 가정하면 일은 현재의 삶 중 1/3을 규정하며, 무슨 일을 해왔고,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또 때로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지가 이력서의 공백들을 채우는 한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기도 한다.

일. 그렇지만 현대사회에서 직장은 더 이상 삶의 터전이 아니다. 리처드 세넷의 "장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일과 삶의 분리, 기계화된 노동으로부터 인간성의 상실을 발견했던 한나 아렌트의 연장선상이기도 하다.

청사진은 불완전한 상태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실제 활용에 앞서 형태가 미리 결정되기 때문이다.
리처드 세넷 지음, 김홍식 옮김, "장인", '1장 속병 앓는 장인', p.81, 21세기북스

직업은 일종의 표준화된 규격이 되었다. 일상의 관심은 언제나 무엇을 하느냐만을 물을 뿐,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어떤 직업이 어떤 일을 하는지, 그 직업을 얻기 위해선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은 넘쳐나지만, 정작 그 이후에 있어서는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듣기가 힘들다. 하지만 리처드 세넷은 동화가 끝나는 지점, 'happily ever after' 이후의 이야기들이 진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손의 감각들, 현장에서 실제로 경험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호한 감각들이야말로 일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표준화된 직업은 실제의 일을 통해 얻는 경험들을 단순한 예외로 치부할 뿐이다. 어떤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매뉴얼이 점점 두꺼워질수록 개인들에게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혹은 동료들과의 협의를 통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게 된다.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상세한 규칙들은 손의 감각에서 느껴지는 생각들을 실행하고 실수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시켜 버린다. 리처드 세넷은 건축의 청사진과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흔히 현실이라고 지칭되는 개념이 얼마나 모호하고 또 정의될 수 없는 것인지를 증명하려 한다.

얼른 결과를 내려고 밀어붙여서는 생각이고 상상이고 있을 수 없다. 몸에 익고 원숙해지는 상태는 오래하는 데서 나온다.
- '에필로그', p.468

"장인"에게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과도 같다. 창의성은 결코 무에서의 창조를 의미하지 않으며 도중에 막히는 부분들을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무수한 실수들에서 비롯된다. 한나 아렌트가 상투어와 침묵을 단호히 거부하는 데에서 현대사회의 해답을 찾았다면, 리처드 세넷은 일 그 자체로부터 해답을 찾고자 한다. 일터에서 삶을 살아갈 수 없기에, 그래서 삶은 지루해졌고, 일은 삶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삶의 1/3이 되었다. 어쩌면 미셸 우엘벡의 생각처럼, 현대사회에서의 절대빈곤은 단순히 수입의 문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