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쉽지는 않다.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덕택에 꽤나 오랫동안 책장에 꽂아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말 마음먹고 끈질기게 매달리다 보면,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진가를 더해가게 된다. 봉건사회, 마르크 블로크는 봉건사회의 기원과 바탕, 양상, 변화와 쇠퇴 뿐만 아니라, 왕에게, 귀족에게, 귀족 중에서도 상위와 하위에게, 일반하층민에게, 또 하층민에서도 또 상위와 하위에게, 중세를 살았던 그 모든 사람들에게 과연 봉건사회란 어떠한 의미였을까를 매우 입체적으로 파들어간다.

(그러나) 장원은 강제적 '첨가'라는 절차 외에도 적어도 겉보기에는 비난을 훨씬 덜 받을 만한 절차, 즉 계약이라는 방법에 의해서도 확대되어갔으며 이 방법이 아마도 특히 중요했던 것 같다. ... (중략) ... 이들 협약은 예외없이 전적으로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것인 양 표현되고 있다. 실제로 언제나 어디에서나 그러하였을까. 이 '자발적'이라는 형용사는 매우 신중하게 쓰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자기가 보호해주겠다고 강요하는 방법은 틀림없이 얼마든지 많았다. ... (중략) ... 그런 중에도 사람들은 사회란 자유스러운 사람과 부자유스러운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버릇을 버리지 않았다.
- 마르크 블로크 지음, 한정숙 옮김, "봉건사회 I", '제3책 하층계급 내에서 종속의 유대관계 - 제1장 장원, 제2장 예속과 자유', 한길사, p. 554-582

더욱 중요한 건 마르크 블로크가 결코 봉건사회, 그 자체로만 시선을 국한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봉건사회에 대한 이야기라며 비록 과잉된 해석을 방지하는 단서를 달아두고는 있지만, 그는 고대와 현대를 잇는 가교로써의 봉건사회를 보여주려는 데에 더욱 노력을 기울이려고 했던 것 같다. 흔히 중세하면 떠오르는 단어, 기사만 해도 전사의 명예와 약탈의 실리라는 이중적 모습을 지니고 있던 고대 로마군인을 연상시킨다. 봉건제의 경우, 마치 노예제와 자본주의가 뒤섞인 듯한, 중간단계적인 이행과정으로 읽을만한 여지가 있다.

그리고 어쩌면 "봉건사회"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중세, 혹은 봉건사회는 단순히 역사적 시기를 일컫는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는 것, 또한 역사란 왕조로 대변되는 지배자들의 전유물도 아니라는 것, 마치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노예들이 생산의 바탕을 이루었듯, 역사책에서 생략되거나 정작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부분들, 당연하지만 곧잘 잊고는 하는 사실, 즉,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것이다.

다만 마르크 블로크의 연구가 유럽, 특히 그 중에서도 프랑스, 독일, 잉글랜드, 그리고 때때로 북부 이탈리아 정도로만 머무른다는 점은 아쉽다고 할 수 있겠다. 전체적인 양상보다는 세부에 집중하기에 전반적인 유럽사에 대한 지식이 장벽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만큼 그는 연구의 한계를 명확하게 설정했기에 오히려 깊이에서는 장점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구절 하나만 추가로 인용하고 마무리.

물론 법이 계속 진화해가는 것을 절대적으로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또 실제로 법은 진화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법의 변화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게 되었으며, 따라서 점점 드물어졌다. 왜냐하면 변화를 심사숙고한다는 것은 변화를 단념한다는 것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 같은 책, '제2책 생활조건과 정신적 분위기 - 제3장 법의 토대', p. 308, 강조는 인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