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도발적이다.

붉은 색을 강조하는 수려한 색감, 뻔뻔할 정도로 노골적이면서도, 탐미의 감성으로 가득한 관능성, 도발적으로 막 던져놓고는 영화를 보러 온 관객에게 모든 책임을 돌려버리는 무책임함까지, "내가 사는 피부"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초창기 영화가 지녔던 압도적인 영상을 연상시킨다.

"마타도르, 1986", "욕망의 법칙, 1987",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1988", "욕망의 낮과 밤, 1990" 등으로 1980년대 후반을 함께 주름잡았던 안토니오 반데라스와의 재회했기 때문인 것일까. 점차 부드럽고 따뜻하면서도 정서적인 언어로 바뀌어가던 그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내가 사는 피부"는 적어도 세 가지의 충격을 안겨다준다. 여성을 미워하여 스스로가 만든 여성조각상과 사랑에 빠졌던 피그말리온의 신화, 주인공 피부과 의사 역의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사랑은 그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왜곡된 편집증에 가깝기도 하다.

첫 번째 질문. 그렇다면 피그말리온의 사랑은 얼마나 진실된 것이었을까. 자신만의 성소에서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환상을 끝끝내 놓지못했던 집착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제목이나 주인공의 직업에서도 연상할 수 있듯이, "내가 사는 피부"는 피부가 갖는 정체성에 대해서도 심각한 의문을 던져놓는다.

화상으로 전신의 피부가 망가져버린 환자, 온 몸의 피부가 재배치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환자, 그들은 스스로가 과거에 지녔던 외모와 현재의 외모 사이에서 심각한 인식의 부조화를 겪어야만 한다. 사랑하던 여인이 만약 남성으로 환생하게 된다면이라는 신선한 소재로 다가왔던 "번지점프를 하다, 2000"에서도 비슷한 의문이 떠올랐던 것 같다.

매우 뻔하고 흔하지만 그리 쉽게 대답할 수만은 없는 두 번째 질문. 외모, 혹은 신체는 한 사람의 정체성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는 것일까. 신체의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다면 기억과 인식 사이의 타협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 것일까.

위의 두 질문에서 이어지는 마지막 질문은 아마도 "내가 사는 피부"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던져지는 질문이 될 것 같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이 작품을 절반의 오해들로 이끌어간다. 결과적으로 보여지는 것들과 실제의 과정이나 실체와의 간극. 여주인공의 외모를 비추는 모니터의 화면, 피부과 의사의 딸에 대한 회상장면 등은 오해로 점철된 이야기의 중심축을 만들어내고, 또 피부과 의사의 형을 지칭하는 "호랑이"라는 단어로부터도 감독의 세심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것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자연의 빛을 통해 얻은 사실들이 정말로 진실로 이어지는 것일까.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쓰고 싶었으나 너무 길고 장황해져 버렸다. 배우들의 압도적인 존재감, 지나치게 아름다운 미장센, 거칠고 투박한 어조와 편집이 어우러져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을 도저히 예측할 수도, 얕잡아 볼 수도 없게 만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