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위키피디아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사랑.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2005)>의 한 남자는 어쩌다 함께 일하게 된 또 한 사람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다크 블루 올모스트 블랙(Azuloscurocasinegro; Dark Blue Almost Black, 2006)>의 한 남자는 자신을 가장 믿고 있는 형의 애인을 사랑하게 된다.




모든 것을 바꾸어버린 하룻밤의 동침

아름다운 중서부 와이오밍의 대전원, <브로크백 마운틴>의 한 사무소에는 일자리를 구하려는 두 사람의 목동이 찾아온다. 그들은 여름 동안 양떼를 보살피는 일을 맡아 산 속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한시도 자리를 떠날 수가 없다. 제대로 씻을 수도 없고, 때로는 곰을 만나 식량을 모두 잃어버리는 등, 함께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은 두 사람은 어느 추운 밤 텐트 안에서 서로에 대한 강렬한 욕정을 품게 된다.

빌딩이 높이 뻗은 도시, <다크 블루 올모스트 블랙>의 어느 한 청년은 감옥에 있는 형 대신 아픈 아버지의 병수발을 하며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비록 우울한 삶이지만, 그는 미래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방송대학에 다니며 언젠가는 좋은 직장을 얻으리라 믿으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을 면회간 청년에게 형은 감옥에서 만난 자신의 애인을 임신시켜달라는 이상한 부탁을 한다.






동성애와 불륜(?) : 이안(Ang Lee)과 다니엘 산체스 아레발로(Daniel Sanchez Arevalo)

이안 감독은 일종의 숭고함까지 느껴졌던 <와호장룡(臥虎藏龍, 2000)>의 대나무숲 장면처럼, 차분하고 시적인 어조로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아픔을 이야기한다. 서정적인 풍경 아래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기타 연주, 억지로 억눌러보지만 터져나오는 흐느낌과 애증의 감정들. 이안 감독은 감정이나 눈물을 강요하지 않지만, 한순간 울음으로 해소될 수 없는 마음의 응어리를 남겨둔다.

"브로크백은 참 좋았어, 그지?"

각종 찬사와 비평 속에 대가라 말해도 손색이 없을 이안 감독과는 달리, 다니엘 산체스 아레발로 감독은 데뷔작 <다크 블루 올모스트 블랙>에서 가볍고 재치있는 언어로 완전한 절망이 되지 못한 슬픔을 보여주며 2006년 베니스를 휘어잡았다. 아무리 힘겨워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 이안 감독이 대자연 안에서 한없이 작은 인간의 깊은 슬픔에 집중한다면, 다니엘 산체스 아레발로 감독은 도시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소시민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월급은 쥐꼬리고 일은 엄청나게도 시켜 먹어. 너 혼자만 힘들게 사는게 아냐"




네가 필요해 : 잭(제이크 질렌할; Jake Gyllenhaal)과 파울라(마르타 에투라; Marta Etura)

양떼로 가득한 광활한 대평원에 단 둘이서 남겨진 잭과 에니스(히스 레저). 밝고 쾌활한 성격을 지닌 잭은 통조림콩 뿐인 식사는 이제 싫다느니, 고용인이 맘에 안 든다느니, 고원 위의 텐트에선 고양이 오줌냄새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느니, 사소한 것들에 온통 불평을 하며 무뚝뚝하기만 한 에니스와 친해지려 한다. 적극적인 잭의 노력 덕에 점차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져가고, 서로를 돌봐주던 두 사람은 어느새 우정 이상의 모호한 감정을 품는다. 그리고 하룻밤의 열정적인 사랑. 일이 끝나고 각자의 생활로 돌아가는 길에서 잭은 아쉬운 듯 에니스에게 한 마디의 여운을 남긴다.

"난 아마 다시 돌아올 것 같아."

주인공 호르헤(쿠임 구티에레즈)의 형 안토니오(안토니오 드 라 토레)는 복역 중인 감옥에선 연극 공연을 위해 죄수들을 모집한다. 하지만 죄수들은 연극보다는 연극에 참여한 이성들을 어찌 한 번 꼬셔볼까에 더욱 관심이 많고, 안토니오 또한 예외는 아니라서 매력적인 복역수 파울라에게 작업을 거느라 여념이 없다. 같은 복역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파울라는 안토니오에게 사귀는 대신 자신을 임신시켜 감옥을 옮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제안을 하고, 한 달여에 걸친 교제기간 동안 안토니오는 그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도통 임신의 기미는 보이질 않는다. 안토니오와 파울라는 최후의 수단으로 면회차 방문한 호르헤를 이용하기로 한다.

"호르헤, 부탁이 있어. 우리 둘이 부탁하는거야. 형 생각이었거든."
"안토니오 형 생각이요? 그게 뭔데요?"
"날 임신시켜줘."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 에니스(히스 레저; Heath Ledger)와 호르헤(쿠임 구티에레즈; Quim Gutierrez)

강한 척 하지만 마음 여린 사람들. 두 영화 모두 적극적이고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상대와는 달리, 책임감이 강한 주인공들은 스스로의 행위를 질문하며 고민에 빠져든다. 잭과 헤어지는 길에서 남몰래 울음을 삼킨 에니스. 어느덧 시간은 지나, 아내 알마(미셸 윌리엄스)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며가던 에니스에게 한 장의 엽서가 날라든다. 4년만의 재회. 모든 것을 각오한 잭은 함께 떠날 것을 권유하지만, 에니스는 가족을 포기할 수는 없다며 그의 청을 거절한다.

"난 이제 내가 여기서 얻은 것들에 너무 집착하게 됐으니까, 이젠 주어진 대로 그저 살아가는 거지."

아버지의 대를 잇는 수위만큼은 되지 않겠다는 호르헤. 그는 주경야독이라는 말을 온몸으로 실천하듯, 청소부로 일하며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봐도 좀처럼 풀리는 일은 없다. 이곳저곳 넣은 이력서는 항상 낙방소식 뿐이고, 마침 유럽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여자친구 나탈리아(에바 팔라레스)에겐 은근히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파울라와의 관계 덕에 죄책감마저 가지게 된다. 호르헤는 파울라에게 임신여부를 물으며 하루빨리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하지만, 파울라는 좀처럼 그를 놓아줄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제가 안오면 다른 남자를 찾을건가요? 형을 기다릴건가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난 당신을 믿어 : 알마(미셸 윌리엄스; Michelle Williams)와 안토니오(안토니오 드 라 토레; Antonio de la Torre)

역시 주연만큼 빛나는 조연들. <브로크백 마운틴>은 히스 레저와 제이크 질렌할의 환상적인 호흡만큼이나, 미셸 윌리엄스가 보여주는 한순간의 눈빛으로도 충분히 기억될만하다. 창 밖으로 열렬히 키스를 나누는 에니스와 잭, 낚시도구를 들고 나가는 에니스, 편의점에서 일하는 알마에게 찾아와 아이들을 맡기고 떠나는 에니스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슬픔과 분노, 공포와 두려움 등 모든 감정이 흡입력있게 함축된다.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한 <브로크백 마운틴>이 진지한 인물설정을 지닌다면, <다크 블루 올모스트 블랙>는 제법 진지한 남녀주인공을 제외한 조연급의 인물들은 다소 우스꽝스럽고 극의 분위기를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호르헤의 형 안토니오 역시 알마처럼 극의 갈등을 심화하고 심지어는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직설적인 생각에 복역수다운 거친 말빨 덕분인지 분위기 자체는 오히려 즐겁고 유연해진다.




난 괜찮아, 상관없어 : 로린(앤 해더웨이; Anne Hathaway)과 나탈리아(에바 팔라레스; Eva Pallares)

그냥 넘어가기에는 아주 약간 아쉬운 커리어워먼들. 각자의 남편과 남자친구보다 내세울 게 훨씬 더 많아, 잭과 호르헤를 주눅들게 하는 여성들이다. 활달하지만 집안에서는 끽소리도 못하는 잭의 옆엔 항상 로린이 있다. 남편의 사랑을 원하면서도, 아무 것도 이렇다할 게 없는 잭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그녀. 눈치도 없지만, 마지막으로 달려가는 장면에서 에니스와 전화통화를 나누며 흘리는 한줄기 눈물은 사랑받아보지 못한 여성의 상처를 드러내보여준다.

<다크 블루 올모스트 블랙>의 나탈리아는 로린과 거의 빼다박을 정도로 닮아있다. 남자친구인 호르헤에게 질투받으며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하는 그녀. 자신을 떠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진 않았던 호르헤가 완전한 이별을 통보하는 충격의 순간, 그녀의 반응은 생각대로 쿨하기 그지없다.

"이제 해냈구나."
"뭘?"
"날 놀라게 했잖아."





푸른 색조의 아이러니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전반에서 에니스와 호르헤가 포기하지 않았던 어떤 믿음을 뒤집어낸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에니스는 가족이 그저 잭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구실이었을 뿐, 단 한 순간도 진정으로 가족을 위해본적은 없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그것은 <브로크백 마운틴>의 모든 사람을 괴롭혔던 불행의 원인이기도 했다.

반면 <다크 블루 올모스트 블랙>의 호르헤는 그토록이나 커리적인 성공을 추구해왔지만, 그를 위해선 커리어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고, 때로는 비인간적인 정도로 냉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하지만 호르헤는 돌봐줘야만 하는 가족과 친구가 있었고, 그는 어떤 것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도 자상한 사람이었다. 놓여진 삶을 벗어나지 않으려 했던 사람의 불행과 벗어나려 했던 사람의 불행. <브로크백 마운틴>과 <다크 블루 올모스트 블랙>는 같은 푸른 빛깔이지만, 색조는 사뭇 다르다.

"뭘 찾는거야?"
"내 자신을 계속 속일 수 있는 어떤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