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드라마 <어글리 베티(Ugly Betty)>는 패션에는 도저히 관심도 없고 어울릴 것 같지도 않은 베티(아메리카 페라라; America Ferrera)가 메이저 패션잡지 '모드'지에 입사하면서 겪는 애환(?)을 그린 시트콤 느낌의 성장드라마이다. 여러모로 소재가 비슷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 2006)>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좀 더 유치하고 황당한 트렌디한 스타일로 가볍게 즐기는데에 모든 힘을 쏟는다는 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기도 하다. 즐거운 잡담과 같은 이야기도 <어글리 베티>의 매력이지만, 베티와 그녀 주변의 철없는 캐릭터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은 더욱 더 쏠쏠한 재미를 안겨준다.

잡지사의 편집자를 꿈꿔오던 베티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드'지 편집장의 비서로 전격 발탁되는 것으로 시작되는 <어글리 베티>는 가족이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잡고 있다. 주요캐릭터들은 베티의 가족, 편집장 대니얼(에릭 마비우스)의 가족, 그리고 '모드'지의 직장동료로 크게 3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캐릭터 설정은 다소 심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가족지향적인 인물들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으며, 이야기 또한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어글리 베티>에서 아마 가장 가족적이지 않을 인물, 월레미나(바네사 윌리엄스)에 대한 묘사가 흥미를 끈다.

월레미나는 '모드'지의 마케팅이사로써 흠잡을 데 없는 야심과 커리어를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그녀는 '모드'지의 차기 편집장으로 촉망받지만, 시즌1의 첫 화에서 잡지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었던 '모드'지 회장의 아들 대니얼에게 편집장 자리는 돌아간다. <어글리 베티>는 비록 여성편력이 심하고, 회장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커리어와는 담을 쌓은 채 방탕하게 살아온 대니얼을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누가 뭐라고해도 그는 회장의 가족이고, 무엇보다도 주인공 베티가 그의 비서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월레미나는 드라마의 악역을 홀로 도맡아하고 있다. 직업적인 성공만을 바라보는 그녀는 쌀쌀맞고 교활하고 오만하며 이기적인 커리어워먼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대니얼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며 온갖 음모와 흉계를 꾸미면서 어떤 수를 써서든 편집장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냉정한 약탈자에 다름 아니다. 월레미나가 가족이나 우정, 사랑 등과는 멀찍히 거리를 유지한 채 오직 성공만을 꿈꾸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인간적인 향기가 떨어져보이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녀의 냉정함보다도 더 차가워보인다.

드라마 상에서 언급되듯이 20년이 넘게 모든 사생활을 포기한 채 회사의 밑바닥부터 커리어를 다지며 올라와 세상의 인정을 받는 월레미나는 '모드'지의 가장 유력한 편집장 후보였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첫 화에서 그녀는 흔히 말하는 낙하산 인사로 인해 대니얼에게 편집장 자리를 빼앗기고, 심지어는 대니얼의 가족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커리어 상의 지속적인 위협을 받는다. <어글리 베티>의 시청자 중에서 대니얼 대신 월레미나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녀를 음험하고 차가운 음모자로 그려내는 건 기만에 가깝다. 월레미나는 이 드라마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느 에피소드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월레미나가 베티가 던진 대사 한 마디가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았다. '너도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야.', 아마 <어글리 베티>가 보여줬던 몇 안 되는 통찰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베티는 결코 대니얼이 될 수 없다. 베티 또한 월레미나처럼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한 단계씩 올라가야 하는 입장에 있다. 언제나 착하고 가족이 최우선이 되는 베티도 더러는 자신보다 운이 좋은 캐릭터나 경쟁상대를 대할 때면 월레미나와 별다를 바 없는 행동들을 보여주고는 한다. 월레미나와의 차이라면 고작 양심의 가책 정도일 뿐이다. 게다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운과 편집장 대니얼이 지닌 권력 또한 베티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드라마는 성장기는 커녕 좌절기에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

영화 <파이트 클럽(Fight Club, 1999)>에서 브래드 피트는 극중에서 'TV를 통해 우리는 누구나 백만장자나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게 환상임을 깨달았을 때 우린 분노할 수 밖에 없다(We've all been raised on television to believe that one day we'd be millionaires and movie gods and rock stars. But we won't. We're slowly learning that fact.)'라고 말한다. 일반적인 시청자는 대니얼은 커녕 베티가 되기조차도 대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노력해도 실패하는 월레미나는 훨씬 더 쉽게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노력하는 이들은 사랑받지는 못하더라도 존중은 받아야한다. 월레미나가 비록 악마처럼 비춰지지만, 정작 그녀의 비도덕성은 대니얼에게서 비롯된다. 타고난 운만으로 차근차근 쌓아온 힘든 나날들을 간단히 무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비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불합리하고 화낼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