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그리고 홍익대 문헌관 4층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GPS10 : YOUNG의 展>... 3일간 잠수타면서 얻은 전부랍니다. -_-;


발단은 이랬죠. 모델을 섭외해서 작업에 들어간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루에게 자극받아 저도 한 번 그 옆에서 깔짝깔짝 작업을 해볼까 싶었답니다. 헌데 정작 바로 전날 섭외가 꼬였다고 전화가 울립니다. 그래도 다들 한 번 보자며 저의 작업을 치켜세우더군요 -_-; 뭔가 불안했죠.

나름 오랜만의 본격적인 작업이라 캐리어에 장비를 바리바리 채우고는 신촌으로 향했습니다!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합니다. 지하철에서 내리기 직전 갑자기 속이 안 좋더니 정신을 잃었습니다 -_-;;; 일요일 오후2시, 신촌역에 계셨다면 제가 길바닥에 누워있는 걸 보실 수 있었을 거예요 ㅠ_ㅠ 턱이 찢어지고, 들고나간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까지 잃어버렸습니다. 역무실에서 난생 처음으로 119 여러분을 만났습니다. 친절하셔서 참 고마웠어요. 완전 민망했는데... 쩝.

여차저차 플린과 루도 역무실로 왔습니다. 이 사람들 저를 바로 병원으로 끌고 갑니다. 일요일의 응급실엔 사람들이 북적입니다. 아픈 분들이 많아 안타까웠고, 덕분에 2시간이 기다렸기에 안타까움이 더합니다. 주사 2대에 9바늘 꿰맸어요. 멍도 군데군데 들어서 무슨 조폭같네요. -_ㅠ 병원을 나오니 플린과 루가 죽어갑니다. 다들 저질체력이예요. 가까운 루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자취방이예요. 슬슬 불안에 먹구름까지 밀려옵니다 -_-;

잠깐 쉬고 무거운 짐을 던져놓은 채로 와우 북 페스티벌로 향했답니다. 작가인 플린이 눈을 반짝이며 앞장 섭니다. 그런데 파장 분위기예요. 끝났답니다 ㅠ_ㅠ... 그래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 "율리시즈"와 "지각의 현상학"을 건져냈어요. 플린도 김연수 작가가 특집으로 다뤄진 "작가세계"를 하나 잡았죠. 내일을 약속하며 다시 루의 자취방으로 갔습니다.

하필 또 오늘은 프리미어 리그까지 한답니다. 플린이 프리미어 리그 매니아예요. 맨유 대 맨시티의 경기를 기대하며, 이미 방바닥에 다들 들러붙어 있습니다. 맥주까지 오네요. 의사선생님께선 절대 술 드시지 말라고 했건만, 저흰 그런 참 호의적인 조언들을 쉽게 무시한답니다. 그 다음 경기가 또 첼시 대 토튼햄이더군요. 제가 또 첼시 팬이예요. 아스날을 좋아하는 플린이 민감해집니다. 집엔 도대체 언제?...

축구가 끝나니 루가 갑자기 개콘부터 해서 하나씩 하나씩 보여주기 시작하네요. 이젠 잠도 멀어져가요. 각종 개그프로그램과 리얼버라이어티의 향연이 끝나고 나니 아침 7시예요. 일단 자고, 오후엔 소독차 병원에 갔다가 와우 북 페스티벌을 다시 한 번 들러 쇼핑하기로 했었더라죠. 깨어나니 이미 오후 5시가 다 되어갑니다 -_ㅠ 자연스럽게 방바닥에 또 들러붙기 시작합니다. 루가 영화를 트네요. 연달아 3편입니다. 차 끊겼네요 -_-... 상태들도 점점 안 좋아집니다. 이상한 개그에 웃기 시작해요.

자연스럽게 또 다음 날이 되고 루는 촬영 때문에 아침 일찍 먼저 나갔습니다. 다행히 플린과 저도 아침 일찍 깼어요. 오늘은 꼭 어제 못한걸 하기로 다짐합니다. 느끼한 서강대표 돈까스로 기름 가득 채우고, 병원에서 가뿐하게 소독을 마친 뒤 홍대로 터덜터덜 걸어갔죠. 그런데 뭔가 횡합니다. 이틀 전 왔을 때랑은 완전히 달랐어요. 책이 있어야 할 곳은 자동차로 빼곡 메워져있습니다. 주차장을 관리하시는 아저씨께 묻습니다. 이틀 전 그 때가 마지막이었대요. 허탈합니다. 처음부터 불길했던 일정은 마지막까지 배신하지 않아요. 씁쓸하게 홍대라도 둘러보자며 발걸음을 돌립니다.

다행히 전시가 진행 중이네요. <GPS10(YOUNG의 展)> 홍익대학원 석사과정 학생들의 전시입니다. 나름 좋았어요. 앞으로 기대되는 작품들도 간간히 눈에 띄었죠. 인형을 소재로 애니메이션의 느낌을 주는 이형 작가의 작품은 왠지 눈에 익었습니다. 일러스트적인 느낌으로 반복의 압박이 있는 박지민 작가나 화려한 색감과 기이한 형태가 인상적인 최문선 작가, 파스텔톤의 키치가 흥미로웠던 유혜진 작가 등은 앞으로 갤러리에서도 보고 싶었어요. 플린이 좋아라하던 윤혜정 작가나 조상은 작가의 작업도 재미있었답니다. 역시 제버릇 어디 안 가요. 매양하는 전시프리뷰, 리뷰로도 모자라 이젠 여기에서도 전시 리뷰를 하고 있네요. -_ㅠ...

이젠 집에 가야합니다. 마지막 전시가 저를 살렸어요. 3일동안 아무 것도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간신히 벗어났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뉴욕 3부작>부터 다시 주문했더랍니다. 다 읽고 잃어버렸으면 그래도 괜찮았을텐데, 얇은 지갑이 마음을 후비네요 -_ㅠ 신촌역에서 <뉴욕 3부작>을 주우신 분은 즐겁게 읽으시길 바래요. 혹시나 이글을 보시면 답글이라도 한 번 달아주세요.

아무튼 플린은 뭐하는지 궁금하네요. 페이지뷰가 떨어지고 있어요. 빨리 포스팅을 해야 될텐데...



추가+
지금 보니 플린이 제조받은 약을 맡아두었었는데, 그냥 그대로 집까지 가져갔네요.
저흰 체력 뿐만 아니라 기억력마저도 저질이니 큰일이예요. -_ㅠ